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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친권지상주의 국가다. 친권 앞에서는 그 어떤 권리도 맥을 못 춘다. 교권도 인권도 딱 거기까지다. 장애가 명백하여 특수교육이 필요한 학생도 학부모가 거부하면 특수반에 편성할 수 없고, 심신의 문제가 있어 즉각 조치가 필요한 학생도 학부모가 “아니, 내 아이가 비정상이란 말이냐? 인정할 수 없다” 하고 나서면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심지어 부모에 의한 신체적 정신적 학대가 의심되는 학생이 있어도 일시적인 친권 정지 요청은커녕, 학부모 소환조차 강제할 수 없다.
보다 못해 교사가 가정방문을 갔다가는 폭언이나 폭행은 기본이고 주거침입으로 고소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친권이 이렇게 드높은 까닭은 부모야말로 누구보다 자식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좋은 조치를 해 줄 사람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자식 사랑은 인륜이 아니라 천륜이라 불린다. 천륜은 당연히 타고나는 것이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천륜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자녀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 자녀를 감금시켜놓고 신체적으로 학대하여 맨발로 탈출하게 만든 부모, 딸을 장기간 성폭행하고 임신과 낙태를 반복한 아버지, 자녀를 살해하고 그 사체를 유기하고서도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한 아버지 등의 사건들은 과연 자녀의 안전한 양육과 교육을 부모의 자연스러운 사랑에 그저 맡겨둘 수 있는 문제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에 대한 보호와 양육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더 복잡하고 까다로워지는 자녀의 양육, 그리고 더 나아가 훨씬 더 합목적적이고 체계적이라야 할 교육을 그저 “자기 자식이니까 오죽 알아서 잘 챙길까?” 하며 부모의 본성만 믿고 맡겨둘 일일까? 이미 현대사회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범위의 지식, 기능, 가치, 태도를 요구한다.여기에 필요한 내용과 방법은 특별한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며, 따로 교육을 받아야만 갖출 수 있다.
이걸 하기 위해 공교육 체제가 존재한다. 공교육은 부모가 원하는 자녀를 키워주기 위한 공공 서비스가 아니라 부모에게 자녀를 사회에 필요한 구성원으로 길러내는 일에 동참하라는 공적인 의무에 더 가깝다. 만약 이 공적인 의무가 친권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사적 욕구 앞에 번번이 흔들리고 가로막히고 있다면, 이는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제대로 꼴을 갖춘 선진국 중에 공적인 교육의 의무와 학생의 인권을 친권 앞에 방치시켜 놓은 나라는 없다.
친권은 매우 소중한 권리다. 하지만 이 권리는 무한히 보장되는 권리가 아니다. 이 권리는 자녀의 인권 앞에서 멈추어야 하며, 다른 부모, 다른 자녀의 권리 앞에서 멈추어야 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공공의 가치와 의무 앞에서도 멈추어야 한다. 이러한 ‘멈춤’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 교육받아야 하는 것들이다. 즉, 이제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됨’을 배워야 한다. 부모됨에 대한 교육 없이 그저 자연적인 본성이니 자식 낳으면 알아서 어떻게든 하겠지 하며 방치한다면, 이는 부모에게나 자녀에게나 또 사회에나 불행이다.
<권재원 |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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