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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의 우리말 중 하나가 비망록(備忘錄)입니다. 말 그대로 잊어버렸을 때를 대비한 기록이죠. 기억이란 한계가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뭉텅뭉텅 잊어버리며, 심지어 다른 정보들과 섞여 전혀 엉뚱한 기억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억은 믿을 바 못 되고 왜곡되기 십상입니다. 더불어 누구나 가끔 기발한 착상을 하지만 떠오른 것을 바로 적어두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중에 ‘아, 뭐였더라’ 머리 움켜쥐고 이마 찧어도 기억에서 퇴색된 아이디어는 오리무중 어딘가에서 끝내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잊어버렸다고 완전히 잊은 건 또 아닙니다. 끄적여 놓은 메모를 들여다보면 ‘아! 그랬지!’ 바로 당시처럼 기억나니까요. 이렇듯 메모는 기억의 타래를 풀어주는 소중한 실마리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배신해도 기록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메모를 참 안합니다. 온갖 자기계발서에서 메모의 힘이 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해도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합니다. 게다가 뭔가 또박또박 순서대로 논리정연하게 적어 놓으려는 강박이 있어서, 단정히 메모하려는 사이 당시의 생생한 느낌은 어느덧 두루뭉술하게 현장에서 멀어집니다.

메모는 데생이 아니라 크로키입니다. 휘갈겨야 메모입니다. 괴발개발이라도 나만 알아보면 충분합니다. 굳이 다이어리가 아니더라도 주머니에 꾸겨 둔 전단지도 좋고 손바닥도 좋고 스마트폰 녹음도 좋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메모가 됩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려도 끄적임의 가치를 또 잊어버리시겠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이를 강조했던 속담을 일러드립니다. -기억하지 말고 메모하세요. “똑똑한 머리보다 얼떨떨한 문서가 낫다.”

역사의 승자는 기록을 남긴 쪽이고 삶의 승기는 꾸준히 메모하는 사람이 움켜쥡니다. 적자생존. 적는 자가 살아남습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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