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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강금실 칼럼]성탄과 부활

opinionX 2018. 12. 11. 14:26

세밑이 되니 바쁘게 한해를 지나오는 동안에 사들이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채 쌓여 있는 책들이며 주변에 흐트러진 물건들을 해가 가기 전 시간을 내서 정돈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만남 속 사람들도 차근차근 떠올려보고 미처 나누지 못한 인사도 챙겨봐야겠다. 며칠 전 시낭송을 하는 송년모임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시를 듣고 있자니, 텅 빈 사막 같은 마음에 물방울들이 떨어져 번지는 것 같았다. 당장 시는 못 쓰더라도 잠들기 전 몇 자 일기라도 적는 버릇을 들여봐야겠다. 올해가 가기 전 꼭 하려 했으나 하지 못한 나와의 약속들도 찬찬히 챙겨보고 마무리해야겠다.

세밑에 나라 안팎의 분위기는 어수선한 것 같다. 캐나다에서 중국 화웨이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 겸 부회장이 미국 당국의 요청으로 체포된 사건은 사드 배치로 인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지던 때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동안 중·미 무역분쟁이 있어왔지만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양국의 친구들 간 사이가 벌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국민갈등으로 번져서 쌍방의 관계들도 나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노란조끼’ 시위도 서민층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사태이며 68혁명 이후 최대 시위가 될 것 같다는 보도를 접하며 추이를 지켜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국내에서는 우리 경제를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많아지고 있어 착잡하고, 무엇보다도 소수정당들의 선거제도 개혁 요구가 좌절됐다는 소식에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다양한 소수정당들과 청년들이 국회로 들어가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열어주는 형태로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김정은 서울 답방’이 실시간 검색어로 높은 순위에 올라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적 일정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내는 뉴스 차원을 넘어 그 저변에는 올해가 가기 전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듯 아주 신선하고 큰 기대감을 가져다주는 시원한 소식을 기다리는 국민의 마음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세상일이 언제나 갈등과 싸움도 있지만, 그것은 다음 단계의 화해와 희망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이어진다. 올해 초만 해도 북핵 위기가 고조되는 게 나라의 큰 걱정거리였는데 이제와서 상전벽해와 같이 상황이 변한 걸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당장의 일들을 좀 깊고 긴 호흡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전에는 세밑에 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통해 자선과 선물, 탄생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으로 나름 따뜻한 한해의 마무리를 갈음한다. 크리스마스 공휴일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19세기 중반 영국 빅토리아시대에 크리스마스 카드와 캐럴, 산타클로스가 등장해서 가족,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과 성찬의 축제로 자리를 잡으면서 일반화가 되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에서 주인공인 예수는 성경에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복음 2장 12절)로 묘사된다. 부처님오신날에 관불회-석가모니 탄생의 상징인 동자상을 목욕시키는 풍습-행사가 있듯이, 크리스마스에 교회는 성탄 구유를 만들어 기린다. 성탄 구유는 1223년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가 처음 만든 후 퍼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성인은 성탄미사에 실제 소와 나귀를 데려와서 동물미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크리스마스보다는 부활절이 더 큰 행사이다. 탄생과 죽음을 이어 보면, 집을 떠나 길거리에서 태어나게 됐는데 갈 곳이 없어 구유에 뉘어졌고, 목수로 살다가 십자가에서 생을 마쳤다 하니, 예수는 참으로 부랑(浮浪)과 비참의 인물상을 나타낸다. 그것이 설령 사람의 아들로서 처음부터 예정돼 있던 영적 삶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한들, 요즘 시대에 이런 인물이 큰 사람이 될 가능성을 과연 어느 정도나 얘기할 수 있을까.

예수의 탄생과 죽음의 생애는 인간적 측면에서 보면 지금 시대에 실감하기가 어렵다. 가난한 이와 약자에게 위로를 주며 언제까지나 그들의 편일 수는 있지만, 물질적 삶에서 예수와 같은 사람이 그처럼 위대해질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은 거의 봉쇄된 게 정직한 시대적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비록 물질적 차원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 속에 빠져있거나, 부랑하며 비참한 삶을 겪는다 하더라도, 영성의 차원에서는 진정 무한히 자유롭고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예수는 각인시켜준다. 인간 내면의 자유와 창조적 상상의 세계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한다.

성경에서 가슴에 깊이 와닿는 부활의 장면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화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 몇 사람이 밤새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아침이 될 무렵 빈손으로 돌아가게 됐다. 예수가 물가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숯불을 미리 피워놓고 물고기와 빵을 얹어 구운 다음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고 그들을 부른다. 

이 장면은 참 고요하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 며칠 전 처형의 대사건을 겪은 스승과 제자가 이리도 평온하게 한데 모여 아침식사를 한다는 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아침식사 후 예수는 베드로에게 세 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면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일화는 예수가 부활하고서도 다시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몸소 보여준 장면이기도 하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한편, 바오로에게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장 4절)고 물었다. 두 사람은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걸로 답했다. 세밑에 성탄과 부활을 생각해보면서 예수의 질문인 박해와 사랑을 곰곰이 마음에 새겨본다. 그 질문에 그들이 대답했던 방식, 그 순교의 길에 대해서도 곰곰이 마음에 새겨본다.

<강금실 | 사단법인 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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