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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이 낯설었다. 37세 청년의 마지막 모습은 주민등록증 사진이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동신병원에 마련된 철거민 박준경씨 빈소를 찾았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단독주택에서 10년가량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박씨는 지난 9월 살던 집에서 강제퇴거당했다. 이후 어머니와 헤어져 빈집을 전전했다. 지난달 30일 임시로 머물던 공간에서마저 쫓겨나자 거리를 헤매다 세상을 등졌다. 그는 광고전단 뒷면에 유서를 남겼다.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갈 곳도 없습니다. 3일간 추운 겨울을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이런 선택을 합니다. 저는 이렇게 가더라도 저희 어머니께는 임대아파트를 드려서 저와 같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유가족은 영정으로 쓸 만한 사진조차 찾지 못했다.

박씨 빈소에서 만난 이광남 아현2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은 “(이런 비극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반복되고 있다. 사전에 예방돼야 하는데, 사후에만 이슈성으로 다뤄지고 만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위원장은 “강제퇴거 금지법 같은 제도적 규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2, 제3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김소연 전국철거민연합회 조직국장은 “서민들은 왜 임대아파트에 못 들어가나? 왜 (정책당국은) 철거민의 주거권에 대해 고민하지 않나? 임대아파트를 조금만 지어야 건설회사 이익이 커지기 때문 아닌가?”라고 물었다.

박씨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머니가 몸을 누일 ‘지상의 방 한 칸’을 바랐다. 그가 떠난 며칠 후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서울·세종 등 조정대상지역 2주택자에 대한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 부담 상한을 200%로 완화했다. 정부가 9·13 부동산대책을 통해 150%에서 300%로 올렸으나 다시 낮춘 것이다. 한 젊은이가 작은 임대아파트 한 채를 목숨과 맞바꿀 만큼 소망할 때, 거대 정당 국회의원들은 집 두 채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깎아주겠다며 짬짜미를 했다.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치이고 밀린다. 고립되고 쫓겨난다. 국회는 ‘줬다 뺏는 기초연금’ 해결을 위해 65세 이상 기초생활수급자 40여만명에게 월 10만원을 지급하려던 예산을 삭감했다.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은 기초연금을 받게 되면 그 액수만큼 생계급여가 깎인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산 4100억원을 편성하는 데 합의했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3급 장애인 20여만명에게 지급하기로 했던 장애인연금(2500억원)도 최종 반영되지 않았다. 한부모 복지시설 아이돌봄서비스 지원 예산은 ‘비정 논란’ 속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정부 원안에 비하면 17억여원이 깎인 액수다. 복지 예산이 줄줄이 삭감되는 사이, 이른바 실세 의원들은 수백억원의 ‘쪽지 예산’을 끼워넣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빈곤이 눈에 보이는 번영을 떠받치고 있다. 이런 불평등과 불공정과 부조리는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까? 프랑스를 넘어 벨기에와 네덜란드로까지 번지기 시작한 ‘노란 조끼’ 시위는 ‘영원히 이렇게 갈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전한 프랑스 시위대의 발언은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현 위기는) 유류세 인상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우리는) 부자는 세금을 더 내지 않는데 빈자는 계속 세금을 부담하는, 미쳐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전에는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이 존재했다. 지금은 엄청난 부유층 아니면 빈곤층이다. 그들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최근 “불평등이 고조되고, 뒤처진 수백만명이 화가 나면 ‘분노의 시대’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수현·이현주·손병돈이 쓴 <한국의 가난>을 다시 폈다. 저자들은 말한다. “현대의 빈곤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 빈곤의 위험범위가 매우 넓어졌다.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도 쉽게 가난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가난의 결과가 물질적 결핍을 넘어 사회적 고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난이 시민권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옅어지고 있다. 빈곤을 예방하고 빈곤에서 탈출하는 데 유효한 체계를 빨리 구축해야 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도입해 정착시키고, 사회서비스의 종류와 수혜 대상을 확대하며,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을 단계적으로, 그러나 중단 없이 추진해야 한다. 이에 대해 국민들이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공저자의 한 사람인 김수현은 지금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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