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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 K가 휴대폰에 저장한 그림 사진을 보여줬다. 네 마리 말의 옆얼굴이 위에서부터 아래 오른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나열되어 앞을 바라보고 있고 맨 아래 한 마리는 입을 벌려 울고 있는 듯한 그림이었는데, 수묵화 혹은 목탄으로 그린 데생을 연상시켰다. 멋지다고 했더니, 원시시대(구석기시대) 동굴에서 나온 벽화라고 했다. 그림의 묘사력이 너무 세련돼서 놀라웠다. 진보의 역사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그럴 터였다. 그 그림 사진은 1994년에 발견된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강 부근 쇼베(Chauvet) 동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Cave of Forgotten Dreams, 2010>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영화는 독일의 베르너 헤어조그(Werner Herzog) 감독의 작품인데,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다. 쇼베 동굴(동굴을 발견한 과학자 장 마리 쇼베의 이름에서 따왔다 한다)은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보다도 시간상 두 배 정도 더 오래된 약 3만2000년 전의 동굴이며 길이는 400m에 이른다. 현재로선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곳이 아니며 계속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인데, 어렵게 프랑스 정부 허가를 받아서 감독을 비롯한 4명의 촬영기사만이 단 6일, 하루 4시간씩 촬영하고 과학자들의 인터뷰와 해설을 담아 특별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첫 구절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고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어마어마한 일에 맞닥뜨리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동굴 입구 가까운 데 사람 손바닥으로 손도장을 찍은 붉은 반점으로 가득 찬 암벽의 한 면이 보인다. 이 손도장은 한 사람이 찍은 것으로 판명됐고, 그 흔적은 동굴 속으로 이어지며 방문객을 안내한다. 키는 180㎝, 찍힌 손 모양을 보면 새끼손가락이 굽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쇼베 동굴 안에는 동굴사자, 동굴곰, 털코뿔소 등 멸종동물을 비롯해서 바이슨(들소), 흑표범 등 약 13종류의 수백점에 이르는 동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결투하거나, 구애하거나, 달리거나-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동물의 다리를 여러 겹으로 그려서 연속적 움직임을 표현하기도 했다. 동굴벽에 손도장을 찍었던 그 사람은 이 수많은 동물들과 살았었다. 어떤 그림은 한 사람이 4만년 전 동굴곰이 벽을 할퀸 자국 위 2.5m 높이에 막대기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다시 어떤 한 사람이 손을 뻗어 벽을 긁어내어 하얗게 만든 다음 코뿔소와 황소를 그려넣고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K가 갖고 있는 휴대폰 사진인 말들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동물들은 동굴 속에 검은색 라인으로 암벽의 울퉁불퉁한 모양을 이용해서 음영을 넣고 살아 꿈틀대는 것처럼 아름답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 벽화들 속에는 1만년, 5000년 간격의 시간들이 묻혀 있다.

영화는 ‘우리는 역사 속에 갇혀 있으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동굴을 방문했던 한 젊은 고고학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사자와 사자 그림 꿈을 꾸었다. 무섭다기보다는 뭔가 심오하고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 사람뿐 아니라, 동굴을 방문한 과학자들 몇 사람은 영화 속에서 잠시 나란히 서서 동굴의 정적에 귀기울인다. 점차 심장박동 소리가 크게 울리며 들려온다. 과학자들은 동굴에 들어가 조사 중에 커다란 방들과 산란한 조명불 속에 있다 보면 구석기 사람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이 아직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하며 돌아다니던 시기에 그려진 이 벽화를 보면, 정신의 진화라는 단순논리는 어이없이 깨져버리고 만다. 동물벽화의 수준이 현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과학연구팀의 팀장을 맡았던 과학자 장 클로트(Jean Clottes)는 구석기인 세계관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유동성(fluidity)과 투과성(permeability)의 개념이다. 유동성은 인간, 식물, 동물의 범주가 상호이동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어서 나무도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동물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투과성은 현실세계와 영적세계 사이에 장벽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이 영계를 가기도 하고 초자연적 영혼이 인간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 두 개념을 종합해보면 그들의 삶은 지금과는 다르다. 장 클로트는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존재라기보다는 호모 스피리추얼리스(homo-spiritualis)-영적인 존재가 맞다고 정의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사람이 영혼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손에 깃든 영혼이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통해 동굴에 그림을 그리던 사람의 흔적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던 데 더하여, 그 시대 사람들이 그토록 동물들을 그린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그 시대의 세계관이라 하는 유동성과 투과성 개념만으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쇼베 동굴 안 벽화에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곤 단 하나 들소의 머리와 여성의 몸을 한 형상의 그림뿐이고 사람 그림이 없다. 이 벽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모습이다. 보통 구석기시대 동굴의 동물벽화가 사냥이 잘되게 기원하는 의미에서의 제의적 벽화라는 해석도 있다 하는데, 그것만 갖고는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다양한 동물들의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무언가 기록을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고, 거기에서는 친밀감과 존중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후기(Postscript)가 붙어 있다. 쇼베 동굴 앞 30㎞ 떨어진 론강 근처에는 프랑스 최대 원자력발전소가 있고, 원자로 냉각에 사용되고 남은 따뜻한 물이 800m 밖 온실에 고여 열대생물권이 조성됐다. 이 정글온실은 쇼베 동굴에 그림이 그려지던 시기에는 빙하로 덮여 있던 지역이었다. 지금은 악어가 유입되어 수백마리로 번식했는데 흰색의 변종악어도 출현했다. 이 악어들이 쇼베 동굴의 그림들을 본다면? 이 질문을 던지며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은 현세의 우리를 이렇게 정의한다-“영원의 시간을 돌아보는 악어”.

<강금실 | 사단법인 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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