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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동료와 교내식당에 가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수저를 뜨다 말고 우리는 첫눈에 반함이 과연 가능한지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처음 만난 날 ‘저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받아야 차후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경험적으로 많더라는 그분의 분석에 나는 첫 느낌이란 대부분 외모에서 비롯되는 것 아니냐며, 남자들에게는 진정 예쁜 얼굴만이 이끌림의 조건인지 물었다. 그분은 그런 이끌림은 객관적 외모의 문제가 아니고 성차의 문제만도 아니며, 인간 본연의 속성이라 반박하셨다. “선생님도 평소 흠모하던 모 교수나 모 평론가 닮은 사람이면 첫눈에 끌리지 않겠어요?” 되물으셨다.

“그건 이야기가 다르죠.” 당황하여 얼버무리자, 무엇이 다르냐며 곧장 반격에 들어가셨다. 가만히 보면 이소영 선생님은 동성에 대해선 친한 순서대로 예쁘다 하는 반면 이성에 대해선 엄정한 잣대를 지녔다는 것이다. 발끈한 내가 반박할 논거를 고르는데, 탁자 저편에서 우리 대화를 가만히 듣던 같은 단과대 선생님께서 “젊은 교수님들 이야기에 끼어들기 민망하지만 제 경우는요,”하며 말문을 떼셨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스틸 이미지

유학을 길게 다녀온 데다 연구를 위해 자연 속으로 자주 들어가는 전공인지라, 선생님은 늦도록 연애나 결혼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단다.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는 자리에도 엉겁결에 지리답사 다녀오던 작업복 차림새 그대로 나갔는데, 여자분께 죄송하고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는 아무 생각도 안 드셨다 했다. 불쾌할 법한 상황임에도 개의치 않던 상대방에게 고마운 마음이 일어 제대로 된 만남을 청했고, 그렇게 두번째로 만난 날이었다.

영화 관람 후 고궁 안뜰을 산책하던 중, 둘은 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뜰 내부를 몇 바퀴나 걸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상대방이 말을 어찌나 사랑스럽게 하던지, 말하는 모습 자체도 그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마음 씀씀이도 일관되게 예뻐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고, 결혼하자는 소리가 여러 차례 입 밖으로 나오려 하였으나 두번째 만남부터 청혼하면 ‘없어 보일까봐’ 말 삼키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고궁 안뜰에 서 있던 십수년 전의 아내 모습이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하셨다.

“제가 정말이지 꼭 안아주고 싶어가지고” 하며 품에 안는 몸짓하던 사춘기 소년 같은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말수 적고 항상 조용조용하던 선생님은 오래전 그날의 설렘을 재연하며 목소리가 몇 톤 높아지고 두 뺨은 복숭아처럼 되셨다. 여섯 학기째 함께 지내며 그분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짐작건대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목도하기 어려울 찰나였을 테다.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를 보면, 세상을 떠나는 여정 중에 사람들이 하늘로 향하는 길모퉁이 사진관에 일주일 동안 머물며 생의 가장 반짝이던 순간을 고르는 설정이 나온다. 작중 인물은 저마다의 기억을 사진으로 찍어서 품에 안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거기서 한 할머니는 어릴 적, 터울 많이 나던 오빠가 꼬까옷 사준 기억을 고른다.

동네 유지 딸들이 입고 다니던 원피스가 마음에 들었던지, 어느 날 오빠가 도쿄 시내를 뒤져 똑같은 옷을 구해왔단다. 그걸 입혀놓은 꼬맹이 동생을 자랑하고 싶던 오빠는 “빨간 밥 사줄게” 구슬려 자신을 데리고 나갔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치킨라이스였지 싶다고. 경양식집 가서 오늘 배운 빨간구두 춤춰 보라 하면 치킨라이스 먹고 싶은 마음에 또 그걸 하고, 그러면 오빠 친구들이 아이스크림 사준다며 데려가고 그랬다고 말이다. “그런 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몰라요. 그 옷 그대로 입고서. 먹을 것에 낚여 여기저기 따라다니고”하며 할머니가 감자꽃처럼 웃으시는데, 영화를 보다 슬퍼서가 아니라 아름다워서 눈물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교내식당을 나서며 깨달았다. 선생님은 언젠가 훗날 길모퉁이 사진관에서 떠올릴 생의 가장 반짝이던 순간을 좀전에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것임을. 글자로만 접해본 ‘해처럼 웃는 얼굴’이 무엇인지 내가 보았음을. 3000원짜리 학식 먹다 뜻밖의 선물을 받았으니 삶이란 이렇듯 찬미할 만한 것이다.

<이소영 |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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