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제헌절이다. 제헌헌법이 탄생한 지 70주년을 맞는다. 제헌헌법은 국민주권, 민주공화국,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권력분립 등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본원리를 담고 있다. 가히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손색이 없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고 아홉 차례 개정을 거쳤어도 헌법의 근간과 기본정신은 변함이 없다. 다만 정권에 따라 헌법규범과 헌법현실 사이에 크고 작은 괴리는 있어왔다. 때로는 법치가 아니라 인치로 기본권이 제한되거나 침해되기도 했고, 권력분립은 장식장에 진열된 장식품에 불과한 때도 있었다. 군사쿠데타로 헌법이 파괴된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헌법유린과 국정농단이 촛불시민혁명으로 바로 세워지기도 했다. 헌법을 살아있게 만드는 사람은 정치인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라 바로 권력의 원천인 국민임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7월 13일 (출처:경향신문DB)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비정상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있다. 법치를 망각하고 주권자를 무시한 군사독재의 잔재가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다. 대한민국 70년 헌정사에서 헌법을 가장 많이, 그리고 아주 심각하게 위반한 군대조직, 기무사가 바로 그들이다. 민주화 이전에도 그랬고 민주화 이후에도, 보안사에서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고도 그랬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기무사는 자신들이 떨어뜨린 새만큼 헌법적 일탈을 자주 범했다. 출범 초창기부터 불법적인 체포와 수사, 간첩사건 조작, 정치공작, 민간인 불법사찰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서빙고 대공 분실은 고문현장의 대명사다.

가혹한 고문으로 회유하고 자백 받아 간첩으로 조작하기도 했다. 민간인 불법사찰과 정치개입 등 과거의 불법적 일탈행위가 최근까지 이어졌다. 권력의 정점을 맛본 기무사(보안사)는 음습한 조작과 공작정치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사달이 났다. 2014년 세월호 가족들의 활동을 사찰한 정황이 담긴 보고서가 발견된 데 이어 탄핵결정을 앞두고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해 3월 위수령 발동 및 계엄 선포를 검토한 문건이 폭로되었다. 독재권력의 핵심이었던 시절에 보였던 행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하라는 군사보안, 군 방첩 및 군에 관한 첩보의 수집 처리 등에 관한 업무는 뒷전으로 하고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 군 병력을 동원해 평화적 촛불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기무사가 2017년 3월 헌법재판소 탄핵결정 직전에 작성했다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 논란거리다. 실행계획으로서 내란예비음모·군사반란예비음모냐 아니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통상적인 검토문건이냐를 놓고 갑론을박하지만 공식 출범한 특별수사단의 수사로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무부처인 합참을 제쳐 두고 기무사가 월권하여 계엄 문건을 작성했다는 점, 진보세력을 종북으로 등치시켜 대비방안을 세웠다는 점, 국방부 내부 검토에서 위헌소지가 있다고 결론 내렸던 위수령 발령을 검토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집회·시위를 화염병 투척, 경찰서 방화·무기탈취의 가능성이 있는 폭도로 몰아 어마어마한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반헌법적 발상이자 비민주적 군사독재의 인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위수령 발령에도 경찰력만으로 치안확보가 곤란한 상황이 되면 계엄을 선포하고 구체적 증원부대와 담당구역까지 지정한 것으로 보아 실제 군 부대 출동을 염두에 둔 실행계획이며 계엄의 법적 요건과 절차에 관한 검토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단계별 발령권자, 계엄업무수행군 구성, 계엄사 편성과 업무 등을 망라하고 계엄 시 정부부처를 감독하는 계엄협조관 파견, 보도검열단과 언론대책반 운영계획까지 마련한 것으로 미루어 실행목적하에 작성한 게 틀림없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당시 청와대 비서실이 탄핵 기각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고 한다. 기무사도 이를 감지하고 기각에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면 다분히 실행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민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아수라장이 될 뻔했다.

세계가 인정한 평화집회의 민주시민이 폭도로 돌변할 것을 가정하고 무력진압의 대상으로 본 계엄 문건이 아니더라도 정치개입과 민간인 불법사찰의 행태를 버리지 못한 기무사는 사라져야 한다. 이름도 바꿔보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는 세심(洗心)의 퍼포먼스도 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치욕적이고 비극적인 역사의 한가운데 자리했던 기무사는 해체되거나 해체에 준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한다. 인력과 예산의 획기적 감축, 기능 대폭 조정이 불가피하다. 위헌·위법을 일삼아 온 반헌법적 국가조직이 1987년 민주화와 2016년 촛불혁명의 시대에 여전히 남아있음은 대한민국의 수치이자 민주주의 헌법에 반하는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