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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이 방종현 등에게서 빌려본 책은 요즘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영인본으로 제작되어 어지간한 학자들의 연구실, 서재에는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소장하고 있지 않아도 도서관에 신청하면 금방 빌려볼 수 있다. 하지만 양주동이 향가를 연구할 무렵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양주동은 최남선이 책을 빌려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지만, 사실 최남선이 책 인심이 후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인색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춘동 선생은 <오주연문장전산>에 ‘취 하여’란 글에서 ‘육당(최남선)은 진본을 찾으면 널리 알리거나 동학과 더불어 함께 보기를 꺼려 하는 성벽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점잖은 분의 조심스러운 표현이 이럴 정도면, 희귀한 책이 있으면 자랑만 잔뜩 하고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남선이 그렇게 아끼던 장서는 6·25전쟁 때 몽땅 재가 되고 말았으니, 최남선이 책을 빌려주거나 아니면 여벌을 만들어놓았더라면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책이 흘러넘치는 시대니 마음만 먹으면 쉽게 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특히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책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최근 어떤 책의 영인본이 나온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이 책의 이름을 말하면, 한문학 혹은 국문학 연구에 종사하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이 책은 18, 19세기를 살았던 문인이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문인들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다른 곳에는 실려 있지 않은 중요 작가의 작품이 대량으로 실려 있어 일찍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작가의 작품 중 일부는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었고, 그것을 읽어본 연구자들은 성리학의 도덕주의가 편만한 조선에서 그와 사뭇 이질적인 파격적 주장과 작품이 있다는 것에 경악하였다.

어떤 분은 이 작가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이 작가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공개된 작품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앞서 말한 그 총서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소재처를 알면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자료를 보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한데 책은 개인의 소장본이었다. 어지간한 연구자라면 혹은 독서가라면 다 아는 그 분은 고서점을 운영하였다.

앞의 박사학위 논문 역시 연구자가 직접 소장자를 찾아가서 자료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역시 일부만을 겨우 보고 쓴 것일 뿐이었다. 이 작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나의 친구 역시 학부시절에 용감하게 그 소장자를 찾아가 자료의 열람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이미 공개된, 보나마나 한 자료의 복사본을 얻어왔을 뿐이었다. 연구자들은 모두 이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사뭇 궁금해하였다.



그 자료를 보기 위해서 나 역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코 볼 수가 없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난 뒤다. 우연한 인연이 닿아 고서감정으로 이름난 분과 선이 닿았다. 그 책을 이야기했더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 역시 그 책의 복사본을 구할 수 없었다. 뒤에 내가 어떤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 책을 꼭 보아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쓴 그 사람에게 부탁해 내게 필요한 부분 몇 쪽을 얻어 볼 수 있었다. 고맙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내용 전체를 보고 싶은 것은 여전하였다. 아니 갈증이 더하였다.

어느 날 정말 그 자료에 접근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선생님(평소에 가까이 지내는 사이다)을 만나 부탁했더니, 그 선생님은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야!” 하고 단박에 허락하는 것이었다. 아, 이제는 되었구나 하고 며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윽고 전화가 왔다. “강 교수, 그 책 말이야…” 그 서두만 듣고 나는 그 책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몇 달 전 같은 과의 교수님으로부터 그 책이 영인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연구실로 찾아가 책을 펼쳐보니, 글씨가 선명하지 못하고 희미하다. 보기가 좋지 않았다. 원본에서 직접 사진을 떠서 영인본을 만든 것이 아니고, 복사본을 다시 복사한 것 같았다. 하기야 연구자에게는 글자만 보이면 된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연구자들을 감질나게 하더니, 누가 이제 와서 어떻게 ‘봉인’을 풀고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단 말이야? 이런 마음으로 첫 권을 열고 첫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보통 이렇게 귀중한 자료를 영인본으로 내게 되면 그 자료의 가치와 소장처, 자료를 구한 방법, 자료를 제공한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 등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 책에는 해제라고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디서 이 자료를 구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책을 돌려주니 동료 교수님이 구입할 것이냐고 물었다. “아니, 필요하면 김 교수에게 빌려보고 말지 뭐” 하고 말았다. 이 책에 볼 만한 자료가 아주 없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이래저래 다 알려졌고, 그에 대한 연구도 어지간히 이루어져 있다. 별로 당기지가 않았다. 또 약간 언짢기도 하였다. 온갖 이유로 몇몇이 그렇게 끌어안고 곶감 빼먹듯이 하더니,렇게 어설픈 영인본이 나온 것은 어떻게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 고소나 고발은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 책을 소장했던 원소장자 분은 세상을 뜬 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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