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상인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쥐면 국가가 재앙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했다. 상인은 이성보다 욕구를 좇아 행동하는 사람들로 이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경우 공동체의 선과 도덕이 근본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정계급의 이기심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의 운명에 대한 ‘플라톤의 저주’는 상인국가뿐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유효하다. 이미 우리는 노동자들이 공동체의 선보다는 이윤추구 경영의 단순 도구로 전락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지난해 세월호 사태에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깨달은 바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에게 노동 3권을 부여한 이유는 집단적 단결을 통해 노사 간 대등한 힘의 균형을 맞추도록 한 것이지만 단지 경제적 이익 향상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었던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 신화를 빌려 맹목적인 도구적 이성을 비판한 바 있다.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는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오로지 앞만 보고 노를 저어가야 하고, 자본가는 들을 수 있는 귀는 있지만 무한경쟁과 이윤추구 경영에 몸이 매여 있어 인간 본성을 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듣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움직이지 못하는 자본가 계급과 다를 게 없다”며 비판적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아도르노의 통찰을 빌리자면 노동 3권이 단지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만을 향유하기 위한 수단에 머물 경우 ‘듣지 못하는 노동자계급’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인간고유의 본성과 자유에 대해 자각하고 스스로 존엄을 지키고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행사할 때 노동 3권은 ‘밥그릇 권리’가 아니라 ‘시민권’이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시민으로서 실천을 외면하고 물질적 이익에만 집착하는 노동자들을 독일 출신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노동하는 동물’이라고 표현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입장해 대화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이 점에서 최저임금, 연금, 세월호특별법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민주노총의 4·24 총파업을 밥그릇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난센스다. 4·24 총파업을 ‘억지파업’이라 비난하며 통상임금 인상에만 골몰하는 현대자동차 노조가 오히려 ‘노동하는 동물’에 가깝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정법의 잣대는 사업장 내에서 밥그릇을 위한 파업만을 합법파업으로 인정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체의 파업을 ‘정치파업’으로 분류해 불법시하고 있다.

차기 유력 대선주자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한발 더 나가 “파업은 매국행위”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김 대표의 노동관은 ‘노동자는 근로를 통해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일제의 황국근로관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노동자는 수출전쟁을 위한 ‘병사’에 불과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존엄과 공동체 문제에 참여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은 ‘주제넘은 짓’을 넘어 ‘반역행위’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부산노동청에서 근로감독관이 노동자를 노예에 비유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단지 개인적 일탈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억압적 노동정책에는 반시대적 노동관이 투영돼 있다. ‘듣지 못하는 노동계급’을 만드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추구하는 노동시장 구조개편의 방향이라면 ‘창조경제’는 성공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노동 3권을 통해 온전한 시민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이윤추구를 위한 노예에 머물러 있는 한 창조경제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미 우리는 박 대통령 동생 지만씨 소유의 회사 노조원을 포함해 억압적 노동정책이 몰고온 노동자들의 숱한 주검을 지켜봤다.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에 앞서 플라톤의 저주부터 풀어야 한다.


강진구 정책사회부 노동전문기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