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검사는 눈물을 보일 수 없다. 조폭 같은 나쁜 놈들만 골라 상대해야 하는 게 수사 검사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수사는 실패한다. 한편으론 일단 포승줄로 묶어 놓으면 그 사람의 운명은 검사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약해서도 안되고 약해질 수도 없는 게 검사인 셈이다.
그런 검사가 울고 말았다. 지난달 26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이철희 특별수사팀장이 피해자 가족들과 면담했다. 그들의 요청대로 수사 상황을 대략 설명해주는 자리였다. 피해자들은 떠나보낸 가족 이야기를 하며 오열했다. 얘기를 듣던 이 팀장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가 갑자기 약해진 건 아닌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이 눈물은 ‘나쁜 놈’을 겨냥하는 검찰의 칼끝을 더욱 벼릴 것이다.
요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믿을 건 검찰뿐”이라고 한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모르겠다. 옥시레킷벤키저가 사과를 해도 피해자들은 “검찰 수사부터 받으라”며 울부짖었다. ‘우리 뒤엔 대한민국 검찰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내를 잃은 남편, 금쪽같은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 코에 호스를 꽂은 아이에게 그 이상의 ‘빽’은 존재하기 어렵다.
검찰의 맹공에 5년간 눈 한번 깜빡하지 않던 옥시는 고개를 숙이고 수사 협조와 보상, 자체 조사를 약속했다. 외면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던 정부도 애경 제품에 대한 재검증과 피해자 추가 조사 등에 나섰다.
검사의 눈물 한 방울이 세상을 바꾼다는 걸 우리는 알게 됐다. 이 사건은 검찰에 오래 방치돼 있었다. 지금까지 검찰은 왜 이 문제를 파고들지 않았을까. 알 만한 사람들은 사건을 골라내는 눈, 이른바 ‘선구안’을 거론한다. 얘기 되는 사건을 잘 발굴해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다른 검사들은 성공할 만한 사건을 골라내는 안목이 부족했다는 해석이다.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가 개최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살균제 피해자를 비롯한 참가자들이 옥시 영국 본사 CEO를 포함한 이사진 8명을 검찰에 형사고발한다고 밝히고 고발장을 접수하기 위해 검찰청사에 들어서고 있다._김정근기자
그러나 검찰 특별수사팀이 박수를 받는 진짜 이유는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섰다는 데 있다. 이 팀장의 눈물은 검찰이 가야 할 길을 웅변한다. 반대로 그동안 이 사건을 외면한 다른 검사들은 검찰이 요즘 보여준 바로 그 모습을 하고 있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힘센 권력자의 비위나 맞추며 승진놀음을 하는 그 모습 말이다. 검찰의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특별수사팀도 지금의 박수에 취해선 안된다. 옥시는 독성물질로 지목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제품에 활용·판매해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옥시가 사용한 PHMG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물질이 아니다. 독성 물질과 제품은 늘 정부 심사를 통과했고, 정부는 사태가 커진 뒤에도 책임 미루기와 외면으로 일관했다. 옥시와 닮은꼴이다.
옥시가 자사 제품의 유독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게 과실이라면, 그 원료인 독성물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의 과실은 없는지 의문이다. 정부가 발행하는 관보를 보면 PHMG는 환경부의 ‘심사’를 무사 통과해 1997년부터 유통됐다. 이런 물질을 걸러내라고 있는 게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 같은 정부 전문기관이다.
수사팀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기 전엔 옥시의 책임 규명도 어려워보였다. 정부 책임자를 수사해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 또한 검찰의 몫일 수밖에 없다. 수사팀은 현재 11명의 검사로 대폭 증원돼 올 초의 2배 수준이 됐다. 관련 정보를 꽁꽁 숨겨놓고 버티는 정부 당국자들이 있는 한, 특별수사팀이 아니면 국민적 의혹을 해소할 길이 막막하다. 물론 이 부분은 국가의 배상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가의 방패가 될 소송 대리인은 사실상 검찰과 한 몸인 법무부이다. 혹여 이런 부분을 신경 쓰면 ‘도로 검찰’이 된다. 검사의 눈물은 진실만을 향할 뿐이다.
홍재원 | 사회부
'일반 칼럼 > 기자 칼럼, 기자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자메모]‘혐오 방조’에 분노한 시민 (0) | 2016.05.20 |
---|---|
LG전자 ‘협력사 죽이기’에 면죄부 준 검찰 (0) | 2016.05.08 |
부산영화제와 탄압 프레임 (0) | 2016.04.29 |
“세월호 인양 현장 기상 악화로 유족 방문 못해” 불신 키우는 해수부 (0) | 2016.04.21 |
]“아들아, 사람들이 왜 여기 나왔는지 꼭 기억해야 해” (0) | 2016.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