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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계속 ‘묻지마 살인’이라고 하더라고요. 범인이 화장실에서 여성을 오래 기다렸다는데 그걸 왜 묻지마 범죄라고 포장하는 거죠?”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주점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모들이 붙은 그곳에선 언론을 향한 날선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어느 20대 여성은 “마치 여자가 잘못해서 평범한 남자가 살인을 했다는 듯한 기사 제목에 화가 났다”고 했다. 다른 여성은 “ ‘강남 유흥가’라고 기사 쓰신 분들, 번화가와 유흥가 어감 차이 모르세요? 여자가 새벽까지 술 먹고 유흥해서 살해됐다는 식으로 기사 쓰지 마세요”라고 메모지에 써붙였다. 뜨끔하고 가슴 시린 말들이었다.
시민들의 지적은 언론의 사건 보도 태도를 되짚어보게 한다. 기자도 ‘묻지마 살인’이나 ‘번화가와 유흥가’라는 단어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언론들은 조회수 경쟁에 몰두하다 보니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표피만을 두드린다. 기사는 점점 자극의 강도를 높여 경쟁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일은 뒷전이다.
22일 오전 대전도시철도 시청역 3번 출구에 마련된 서울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피해자 여성 추모의 벽에서 시민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_연합뉴스
국가기관도 다르지 않다. 지난 18일 피의자 김모씨에게 정신병력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전화를 건 기자에게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정신이상자(범인)가 한 얘기를 일일이 해서 뭐하시게요”라고 했다. 정신병력이 있다는 이유로 김씨가 하는 진술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식이었다. 그런 것은 기자가 알 필요 없고 사회적으로 논의될 가치도 없다는 경찰의 편협한 인권 감수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경찰은 여성혐오 범죄 아니냐는 논란이 일자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경찰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했다가 한나절 만에 “공개하기 어렵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사이 장외 논란은 더 증폭됐다.
그동안 혹시 우리는 여성혐오, 그 무엇에 대한 혐오를 방조해오지 않았는가. 피해 여성에 대한 추모가 시작된 이후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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