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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역사란 참으로 잔인해서 우리가 1987년 이후 여기까지 오는 데 30년이 걸렸다. 대학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직접 가르치고, 대화를 나눠 보기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젊다고 여겼는데, 그들을 만나고 보니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란 서늘한 깨달음을 얻는다.

저 나이 무렵의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도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만나는 젊은 친구들은 30년 전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우리 세대에게 4·19가 너무나 먼 과거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저들에게 5·18과 6·10은 어떤 의미에선 조선왕조 500년보다 낯설고 먼 과거의 이야기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선박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을 ‘좌표’라고 하는데, 육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원양에서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하기 위해 과거의 인류는 천문학에 의존했다. 우리가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를 ‘항해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직접 원양 항해에 나섰기 때문이 아니라 원양 항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확한 태양의 적위표(赤緯表)를 얻기 위해 천문대를 건설했고, 항해학교를 설치해 전문적인 선원들을 양성했다. 그로부터 대양의 시대가 열렸고, 원양 항해를 위한 ‘시진의(chronometer)’를 만들 수 있는 과학기술이 축적되었다.

현대에는 위성의 전파를 수신해 좌표를 확인한다. 그 덕분에 인류는 원양 항해의 위험과 한계를 극복했지만, 연안의 복잡한 수로를 통과해 항구에 안전하게 배를 대기 위해서는 여전히 ‘도선사’라는 보다 뛰어나고, 경험 많은 전문가의 조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역사 읽기에 비유하면 가까운 근세사일수록 세밀하게 읽고 해석해야 할 자료와 사건의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사건 중에서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인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사건마다 부표를 설치하고, 그 사건의 의미가 다른 방향으로 오도되지 않도록 의미를 구성(앵커링)하는 것이 오늘의 역사가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근현대사는 일국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복잡한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고, 전 세계를 역사적 시공간으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의 힘으로 그 시대를 연구하여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지나친 오만일 것이다. 우리가 해방 전후사를 자신의 힘으로 연구하여 우리 시각으로 살피기 시작한 것이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이다. 그동안 뜻있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많은 사료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은 상황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시선을 아시아와 세계로 넓혀 나가야 할 때이지만,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역사는 그 의미와 해석을 두고 이웃한 중국, 일본 등과의 치열한 논증과 점검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학만큼 논리와 과학적 학문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분야도 없을 것이다.

과거 몇 차례에 걸쳐 국가가 주도하여 역사를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구호가 아니라 확실한 통치철학과 역사 인식을 가진 정부라면 이를 환영하지 않을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국가권력의 관심이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비롯한 꾸준하고 지속적인 지원과 장려가 아니라 이벤트나 정책의 나열에 그친다면 미숙한 선장이 직접 배를 몰아 항구에 들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흐르고 시대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외면당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축적하고 정리해 나가면 그로부터 역사의 진실은 자연히 규명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수와 진보, 민족주의라는 일국적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역사 인식 속에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과거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폭압적인 현실과 투쟁하면서도 민족의 독립과 함께 인류공영과 세계평화를 꿈꿨다. 좌우의 날개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겹눈의 시선으로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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