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영향


눈물을 흘릴 때 내 얼굴은 할머니의 얼굴 같다


입술을 내밀 때 내 얼굴은 외증조할머니의 얼굴 같다

먼 옛날 할아버지가 집어던진 목침에 맞아 이마가

깨진 할머니의 얼굴이 어느 날 내 愛人의 얼굴에


가을, 붉은 단풍이 든다


- 신기섭(1979~2005)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고, ‘언어의 초월’을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새로움은 불행을 담보한 후에야 도약하는 관념이어야만 하는가. 울고 있을 때 표정이 할머니와 닮아 있고, 입술을 내밀 때, 그러니까 말을 하려는 찰나이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구애할 때의 표정이 외증조할머니를 닮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정서와 의지는 할머니와 외증조할머니 같은 모계사회의 질서 속에서 발발된 것이고, 나는 그들의 표정을 조금씩 나눠 가진 뒤에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나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의 자리가 없다. 어머니는 공백이다. 어머니 대신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의 얼굴에는 폭력으로 훼손당한 할머니의 표정이 있다.


신기섭은 고아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없던 불행한 시인은 어머니 대신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들에게서 어떤 근원의 표정을 찾으려고 애썼고, 그것은 가장 오래된 것이자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가을에 단풍이 든 것처럼 원숙한 정서가 그런 원초적인 물음에 답을 달며 솟아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 오직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눈이 있다. 슬픔만을 감지하는 새로운 눈!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