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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성

무관한 예화벌들이 눈 뜬다. 노동을 위한 생성. 우윳빛 겹눈 위로 그림자가 지나갈 때 검은 날개는 체제를 지배했다. 꽃과 집 사이를 오가며 지나는 계절. 꿀에 전 작업복을 버리듯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는다. 개미들의 환영이 파도처럼 밀려오길 바랐지만 실상 가다 막히는 좁은 시냇물에 불과했다.

- <전체성> 부분, 박희수(1986~ )

 

 

△ 총체가 불가능한 세계에 버려진 주체들의 외침으로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까. 이 시에서 벌이 일하는 모습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노동 주체들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벌들에게 날아간다는 행위란 우선은 꿀을 모으기 위한 노동이며, 벌들의 노동이 가중될수록 이곳의 체제를 지배하는 논리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러나 또 벌들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꽃에서는 꿀을 캐는 노동을 하고 벌집에 와서도 ‘질서정연’하게 꿀을 챙겨놓기 위해 노동을 한다. 다시 말해, 벌은 안식이 없는 오직 노동을 위해 기관화된 몸이다.

그렇게 노동으로 자신의 생애를 기관화시켰던 일벌 “두셋이 바닥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아무도 그들을 애도하지 않고 개미에 의해 분해되어 장례가 치러지지도 않는다. 그저 노동자들은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기관들이며 애도 없이 버려지는 ‘조각’들인 것이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시인은 이것을 ‘무관한 예화’라 했다. 아무런 자극을 줄 수 없는 개인의 사연이라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의 죽음은 그저 “좁은 시냇물”을 건널 때 느끼는 불편함일 뿐, 근대의 역사 속에서 어떤 자극이 되지 않는 하찮음이라, 우리는 그 광경을 관람할 때면 더 참혹해진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도 제 몸속에 하나같이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유독 그 벌들의 독이 깊어 보인다.

박성준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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