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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掌篇)- 2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1921~1984)







△ 10전의 화폐가치를 가늠해보기 위해 1924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읽는다.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10전짜리 백통화가 있었고, 백통화 단위가 푼(닢)이었고, 80전이면 모주(탁주의 일종)에 설렁탕(당시 설렁탕은 귀하고 비싼 보양식이었다)을 살 수 있었나 보다. 운수좋은 날 구걸한 1전, 2전을 모아 10전으로 바꾸기를 두 번! 선물이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주기 마련이다. ‘균일상’에 불과하더라도 ‘태연하게’ 돈을 내고 밥을 사먹는 이 사소한 다반사(茶飯事)가, 문전박대에 배를 주리며 떠돌던 거지소녀의 오랜 꿈이었으리라. 올해는 ‘10전짜리 두 개’뿐이었으나 내년에는 세 개를 들고 와 셋이서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해는 세 사람의 생일에 맞춰 세 번쯤 와서 먹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배 고파서가 아니라 추억을 새기기 위해 먹으러 왔으면 좋겠다.


“참담한 나날을 사는 그 사람들을/ 눈물 지우는 어린것들을/ 이끌어 주리니/ 슬기로움을 안겨 주리니/ 기쁨 주리니”(‘내가 재벌이라면’) 하는 마음이었기에 시인에게는 ‘거지소녀’가 아닌 ‘어린 소녀’로 보였으리라. 긴 이야기와 커다란 울림을 담고 있는 손바닥만 한 장편(掌篇)의 시다!


정끝별 |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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