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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 동화작가



얼마 전 재미난 블로그를 알게 됐다. 사랑앓이 중인 사람들이 고민을 상담하면, 상황을 분석하기도 하고 조언도 해주는, 소소하지만 실감나는 연애 이야기들을 맛깔스럽게 풀어나가는 블로그다. 저마다 설레고 아픈 사연들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란 본디 그런 데가 있지만 더구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그 사람의 사소한 눈짓 하나조차 사랑의 증거로 보이는 그런 상황. 그렇게 콩닥콩닥하다가 알콩달콩 잘살게 되면 참 좋으련만, 알고보니 나 혼자 김칫국을 배 터지게 들이켰다는 속 터지는 결말이 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딱, 그런 기분이었다. 대선 결과를 보며 여태 마신 김칫국이 한꺼번에 역류해 속을 박박 긁어대는 것 같았다. 


(경향신문DB)


그제야 생각해보니, 그래, 패색이 짙었다. 대선기간 내내 여론조사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대선 이전에 이미 상황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최선의 그림은 진작에 물 건너갔고 최악만 아슬아슬 피해온 상황에서 어떻게 역전을 꿈꾸었을까.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이고 보이는 대로 믿은 것이다. 


2012년 12월19일 오후 5시59분까지,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세 종류로 나뉘어지는 줄 알았다. <레미제라블>의 그 마지막 노래의 가사처럼 ‘바리케이드 너머’의 세상을 꿈꾸며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 지금 당장의 작은 변화를 바라는 사람 그리고 팬덤 정신으로 무장한 어르신. 그래서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는 나 역시도 김칫국을 마냥 들이켜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에 노동자 후보가 당선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설마, 아무려면, ‘불의’의 꼬리표를 단 후보가 당선될 리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거꾸로 흐를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다카키 마사오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도, 아는 오빠한테 아파트 30채를 선물받았다는 남사스러운 고백이 생방송으로 중계돼도,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랬다. 이런저런 의혹이며 특히 막판에 터진 BBK 동영상이 막대한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선거는 흑과 백을 가리는 일이 아닌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를 몰라서도 아니고, BBK가 치킨 브랜드인 줄 착각한 것도 아니다. 노동자 후보가 민주당보다 더 친노동자적이라는 걸 몰라서 노동자들이 노동자 후보를 외면하는 게 아니다. 선거는 베팅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가리는 OX 퀴즈가 아니라 냉혹한 승부의 세계다. 누구는 이 한 판에 담보대출비율이 50%를 넘긴 지 오래인 아파트가 걸려 있고, 누구는 배우자 몰래 시작한 깡통 주식계좌가 걸려 있고, 누구는 밥줄이 걸려 있고, 누구는 불효막심한 자식들에게 이 애비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승부가 걸려 있고, 누구는 생명줄이 걸려 있는, 그런 피 튀는 도박판.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승률과 이익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한판 승부.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베팅한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그들이 옳았을까? 그들은 5년이 지나는 동안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게 될까? 예단하기 이를 테지만, 아무튼 그들은 다음 판에도 역시 ‘베팅’할 것이다. 흑백을 가리는 게 아니라 승률을 따지게 될 것이다. 나는 쟤보다 깨끗하다고 상대방을 향해 ‘얼레리꼴레리’나 하는 걸로는 결코 판세를 뒤집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김칫국만 백날 들이켜며 상대방을 탓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연애 전문 블로그 주인장은 이런 충고를 한다. 김칫국을 마신 것으로 결론났다면 미련없이 물러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고. 여태 나한테 보낸 그 웃음은 뭐였냐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말라고. 패배를 자인하고 깨끗하게 물러나 스스로를 멋진 사람으로 만든다면 다음 기회엔 분명 사랑을 이루게 될 거라고.


2013년, 사랑도 정치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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