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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선거 등 대사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꼭 방문하는 곳이 있다. 서울 동작동 현충원과 광주 5·18 묘역이다. 두 ‘국립묘지’는 당선 이후 가장 먼저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호국영령과 민주화 열사를 모신 곳으로, 대한민국 정치적 의례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나는 그 두 곳에 더해 ‘금강휴게소’ 인근을 추가하고 싶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경제를 바꾼 가장 위대한 순간 1위’로 꼽히는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이 서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 주인공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이 나라 ‘산업역군’의 서러운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인 것이다.


 그곳에 위령탑이 있는 이유는 옥천터널(옛 당재터널)을 비롯해 가장 험난한 공사 구간이어서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경부고속도로 순직자는 77명이다. 실제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 공사감독관 등을 지낸 이들의 증언이다.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스러진 산업역군’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다. 77명조차 정부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희생자 대부분이 ‘산업화의 길’을 터준 ‘자원봉사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 숨진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에서 묵념하는 박정희대통령 (경향신문DB)


하지만 이제는 그들을 포함한 산업역군에 대해 ‘국가적 보상’을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물질적 보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보상, 즉 대한민국 역사 속에 그들에 대한 ‘존중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보다는 그들을 대한민국 산업화 주역으로 세우고 기억해야 한다. 5·16을 둘러싼 작금의 역사 논쟁이 그 일환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말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저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 힘든 일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라고. 호국영령과 민주화 열사와는 동급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졌든, 어떤 방식이었든 그들의 노역을 바탕으로 했던 산업화와 경제성장 없이도 이 나라를 외부의 침탈과 전쟁 위협에서 지켜내야 한다는 호국의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또 사회적 자원의 자유롭고 평등한 향유를 위한 민주주의적 열망이 퍼져나갈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은 여타의 선진국가들과 달리 국가건설과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유독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취약했던 나라였다. 병역기피를 포함, 독재권력과의 이러 저러한 유착에 의존한 각종 부정부패는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 나라가 점점 더 정치적, 사회적 갈등 해소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형성된 권위가 부재한 탓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에서 갈등 해결에 필요한 정치적, 사회적 권위는 자신의 삶을 격변과 고난의 근현대사 속에 고스란히 내다바쳤던 산업역군과 같은 ‘무명의 전사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권위는 지위와 돈에 기댄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헌신적 삶의 애환에 대한 다수의 공감과 존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기려야 할 산업역군이 어디 경부고속도로 순직자뿐일까. 꽃다운 젊은 나이에 머나먼 독일에 건너가 광부와 간호사로 죽을 고생하며 번 봉급을 나라 빚의 담보로 기꺼이 내주었던 이들. 아예 목숨을 담보로 ‘용병’ 오명마저 뒤집어쓴 채, 베트남전에 참전해 외화벌이에 큰 몫을 했던 이들 역시 그러하다.


한 나라의 품격은 역사 속 이름 없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런던올림픽 개막식 때 우리는 ‘노동자에 대한 존중의 퍼포먼스’를 보았다. 노동자들이 영국 역사와 각국 선수단을 맞이하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더 이상 초강대국이 아닌데도 영국을 공부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세계 10위권에 달하는 경제규모와 세계 일곱번째로 ‘2050 클럽’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이제 그런 품격을 갖춰야 할 때가 되었다. 정치권이 앞장서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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