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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글 연구의 바른 길을 찾아서, 홍윤표 위원장에 대한 반론
경향신문 6월17일자에 실린 홍윤표 한글박물관 개관 위원장의 한글에 대한 석학 인문강좌를 읽고 적잖게 놀랐다. 새로운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도 오래된 주장을 비판없이 되풀이한 것도 있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으나 넉넉한 근거를 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낱낱이 따져 보자.
먼저 한글을 발음기관의 모양을 상형하여 만들고 옛날 전서를 본떴다고 하는 주장을 아직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홍 위원장은 이 주장을 한글의 닿소리와 홀소리의 기본 글자는 상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기본 글자 이외의 글자는 가획과 합성, 병서, 연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 방법이 옛날 전서를 만드는 방법과 같다고 풀이하였다.
한글이 알파벳에 속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상기할 때 이런 <훈민정음>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알파벳으로서, 즉 일정한 기표들의 체계(흔히 말하는 한글 24자)로서 한글은 그 기의가 기표(곧 음소)로서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형식적 기호의 집합이다. 즉 의미를 극단적으로 추상하여 기표가 그 자체로는 의미없는 음소를 가리키는 경우에 성립하는 글자다. 이러한 추상은 그 자체의 의미에 따라 <훈민정음>이 내세우는 ‘상형’을 배제해야 한다. 기호학의 관점으로 보면 상형은 도상의 성격을 띠며 도상은 그 원본이 되는 지시체와 연관되어 있다. 이 연관이 끊어지지 않는 한 추상적 기표들의 집합인 한글은 성립될 수 없다. 옛날 전서를 본떴다는 주장에 따라 홍 위원장은 20여가지나 되는 다양한 전서 만드는 방법을 한글 창제에 가져 온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훈민정음>이 내세운 ‘상형’과 ‘고전 모방’은 실질적 내용이 없는 겉허울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한자를 만든 기본 원리인 상형과 같음을 주장하거나 중국 고대 문자와의 관련을 내세워 새로운 문자를 시행함이 사대모화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글은 사대 모화가 국시였던 시대에 태어났다. 성리학자들이 한글 창제와 보급을 중화 질서로부터의 일탈로 보고 반대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훈민정음>이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다음으로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언문’의 정확한 의미다. 만들 때의 한글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 또는 ‘정음(正音)’이었지만, ‘언문(諺文)’이란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유려한 글씨를 정교하게 새긴 목판으로 인쇄됐다.
‘언문’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낮추는 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이제까지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언문’에 낮추는 뜻이 없다는 논의가 더 자주 나오고 있다. 더 나아가 홍 위원장은 한글을 하층민이 주로 사용했다는 주장도 억측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흐름은 문제가 많다. ‘언문’은 ‘문자’ 즉 한자에 대립하여 사용한 이름이었다. ‘문자’는 그때로서는 한자 즉, ‘진서’만을 가리켰으며 ‘진서’ 외의 글자는 모두 ‘언문’이라 불렀으므로 만주문자, 몽고문자, 일본문자들도 모두 ‘언문’에 속하였다. ‘진서’ 또는 ‘진문’은 진짜 글자, 진리의 글자로서 신성한 ‘성현의 문자’였다. 학문과 교육에 ‘진서’만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언문’은 나날말을 적는 도구였을 뿐이다. 중세 사회에서 입말과 글말, 학문 언어와 나날말의 이원적 분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언문은 학문과 정치에 방해된다’고 하는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 나타난 주장은 당시의 통념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언문’을 학문, 교육, 정치의 바깥 영역인 소설, 편지 등에서 주로 썼다. 이러한 ‘언문’의 뜻매김은 세종이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린 백성’이 나날이 씀에 편안하게 할 따름이라고 한 것과도 일치한다. 조선 후기에 ‘언문’의 쓰임새가 늘어나지만 ‘진서’의 지위가 흔들릴 정도는 결코 아니었고 미세한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한문으로 씌어진 원문이 없는 언해본 출판이 늘어난 사실이 한글 전용의 흐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한글로만 쓰기라는 개념이 일어나려면 ‘언해’라는 불완전한 번역 양식에서 아예 벗어나야 한다. 언해 작업은 ‘진문’에 대한 풀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언문’의 정확한 뜻을 알면 왜 주시경이 ‘언문’을 버리고 ‘한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언문’에 낮추는 뜻이 없었다는 주장은 주시경이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과학적’ 언어학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주시경에 대한 이런 의구심은 전통적인 말글 의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김영환 | 부경대 교수·한글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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