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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대회를 열어 ‘법외노조’로 출범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89년 6월15일. ‘우리’가 다니던 대학에서 예정에 없던 전교조 서울시지부 결성대회가 기습적으로 열렸다. 당초 다른 학교로 예정됐던 대회 장소가 경찰의 원천봉쇄 때문에 급하게 우리 학교로 바뀌었다. 오전부터 모여든 선생님들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 1000여명에 달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수천명의 전경을 투입해 학교를 겹겹이 둘러쌌다. 우리들은 경찰의 교내 진입을 막기 위해 대치에 들어갔다. 학교에 미처 들어오지 못한 수백명의 선생님들은 교문 밖에서 농성을 하다 경찰에 강제해산되고 수십명이 연행됐다. 그날 저녁 서울시지부 결성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문제는 선생님들의 귀가였다. 선생님들은 다음날 경찰에 자진출두할 테니 길을 터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서울시지부 간부들의 연행방침을 고수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협상은 결렬됐고 당시만 해도 대학가에서는 너무나 흔했던 화염병과 짱돌, 최루탄과 곤봉이 난무하는 충돌이 예상됐다. 그러나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이날은 평화행진을 하기로 했다. 스크럼을 짜고 전경들이 기다리는 교문 앞으로 그냥 걸어갔다. 수백명의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경찰 버스에 끌려들어갔다. 본의 아니게 대열의 앞부분에 있던 나도 인근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럼에도 크게 억울하지 않았던 건 전교조가 내건 ‘참교육’ 기치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을 입시에만 매달리는 공부기계가 아니라 민주적이고 주체적인 시민으로 키우고, 이기적인 무한경쟁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상은 암울한 초·중·고 시절을 막 통과한 우리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는 젊었다. 우리들 중 누구는 싸구려 감상주의에, 누구는 무모한 소영웅주의에, 누구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순정적 이상주의에, 누구는 그냥 선배에게 이끌려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날 밤 선생님들과 우리들이 함께한 도서관 앞 집회는 열정과 희망이 폭발했고, 잡혀갈 줄 알면서도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을 향하던 대열은 신념과 순수의 발현이었다.

전교조 탄압중단 외치는 교사들


전교조는 그 후 오랫동안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선생님 1500여명이 해임되고, 100여명이 구속됐다. 전교조는 탄압 속에서도 교육개혁운동과 합법화 투쟁을 계속했고,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해직된 선생님들의 대부분이 복직됐다. 당시 정권은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는데,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권을 제한하는 후진적 노동정책은 걸림돌 중 하나였다. 선생님들의 복직은 이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환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권이 바뀐 1999년 1월 교원노조법이 국회를 통과해 그해 7월1일 전교조는 합법노조로 새롭게 태어났다.

2014년 6월19일 전교조가 25년 전 출범할 때처럼 다시 법외노조가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가 피흘리며 얻어낸 소중한 가치가 또 하나 부서져 나갔다. 판결을 한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만의 책임이 아니다. 전교조 조합원인 9명의 해직 선생님들 때문도 아니다. 전교조를 ‘악의 소굴’로 몰아붙여 온 보수정권들 탓만 할 수도 없다. 우리들도 ‘한몫’을 했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고 중년기의 건강이나 이야기하며 그저 살기 위해 살고 있는’ 우리들도 시대의 배신을 거들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룩한 가치들이 앞으로 또 어떻게 파괴당할지 걱정된다면 우리를 반성하는 데서 다시 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독한 시대의 유혹 속에서 많은 것들이 폐기됐고, 수정됐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김준기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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