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경향의 눈]‘내려’

opinionX 2014. 12. 22. 21:00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세계 5위 항공사 아닌가. 그러나 속은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재벌 3세의 일탈과 증거조작, 거짓말, 은폐, 회유, 협박이 난무하는 막장 드라마였다. ‘땅콩 회항’ 사건은 견제받지 않는 오너 권력이 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충격적인 것은 별에서 온 것 같은 오너의 탈선만이 아니다. 그것을 용납하고 지원하는 병든 기업문화도 큰 문제다. 시민은 이번에 재벌과의 극심한 간극을 재삼 확인하고 있다. 동시대인으로서의 유대감이나 동질감은 희미해졌다. 재벌의 사회적 존재 공간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정작 비행기에서 내려야 할 사람은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었다. 박창진 사무장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기내에서 고함치고 업무를 방해한 승객은 제재 대상이다. 수갑 채워 뒷좌석에 격리하는 게 규정이다. 대한항공은 7년 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을 그렇게 조치했다. 이번엔 달랐다. 경고나 격리처분은커녕 그의 지시대로 비행기를 되돌리고 사무장을 내려놓았다. 이유는 단 하나, 오너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 (기장에게) 연락해서 비행기 세워. 나 이 비행기 못 가게 할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수백명이 탄 항공기를 자기 승용차 다루듯 한 것이다. 말투는 떼쓰는 아이를 닮았지만 권력은 제왕 못지않으니 더 무섭고 위험했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 일부의 까칠한 기내 행각은 호가 나 있다. ‘세 마디 가족’이란 별명이 나올 정도다. 세 마디는 ‘이름이 뭐예요? 이렇게밖에 못해요? 똑바로 하세요’다. 승무원들의 반응도 세 가지, ‘무안하거나 비참하거나 화나거나’다. 오너 가족이 탑승객 명단에 오르면 비상이 걸린다. 사발통문이 돌고 작전하듯 의전을 준비한다. 눈치 빠르고 성격 좋고 인내심 강한 1급 승무원들로 근무조를 짠다. 기내 청소도 여러 번 한다. 한동안은 특히 유리창을 공들여 닦았다고 한다. 유리창틀을 훑어 먼지 묻은 손가락을 승무원 옷에 문질렀다는 ‘전설’이 나돈 뒤부터다. 짐가방도 특별 대우한다. 흠집이라도 나면 ‘초상집’이 될 게 뻔해서다. 몇 겹씩 포장하고 옮길 때는 가방 60개 들이 컨테이너에 달랑 오너 가방 1~2개만 싣고 간다. 이런 일도 있었다. 1등석에 탄 모 부처 장관이 가장 나중에 내리겠다고 해 사무장이 보고하자 오너 가족은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요?”라고 타박했다. 그런데 그는 내리면서 엉뚱하게 “장관님 먼저 내려드려야 하는 거 아냐?”라고 ‘지적’했다. 그 사무장은 제대로 항변도 못하고 근무태만이란 사유로 경위서를 썼다.

‘땅콩 회항’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범접 못할 권력에 짓눌려 있던 직원들의 울분과 굴욕, 정의감이 조 전 부사장의 월권 행위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사무장은 “나는 개가 아니고 사람이다”라고 했다. 대한항공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퇴행적 기업이며, 그 안에서 제왕적 오너가 세습받은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현실을 통렬하게 고발한 것이다. 부와 권력의 무조건적 세습으로 왜곡된 기득권 의식을 가진 재벌 3세는 직원을 대할 때 ‘주인과 하인’이라는 전근대적 발상을 하게 된다. 한국적 재벌 문화가 낳은 비극이다.

'땅콩 리턴' 사태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12일 오후 서울 강서구 공항동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마친 후 조사를 받기 위해 항공안전감독관실로 향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외국에서는 직원을 왕으로 섬기는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 자산의 95%는 직원이다”라고 외치는 미국의 IT기업 SAS가 그렇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은 집안 세습은 하되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잣대로 후계자를 가려 명성을 얻고 있다. 한국에서는 ‘직원이 아니라 구성원’을 강조하는 제니퍼 소프트란 기업을 꼽을 만하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깔끔한 매너로 승무원들에게 ‘1등 1등석 승객’으로 불리는 항공사 오너도 있다. “대한항공은 대를 이어 세습될 것이다. ‘을’로서 품성 좋은 자식이 경영권을 물려받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조종사들의 목소리를 오너 일가는 귀담아들어야 한다.

대한항공은 ‘조현아 구하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구렁텅이에 빠졌다. 국토부에서는 고개만 숙였지만 검찰에선 허리를 90도 꺾어야 했다. 이제는 사법처리를 피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 경영일선에 복귀할 것이다. 그와 대한항공은 달라질 것이고 달라져야 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박 사무장의 용기다. 그가 자긍심을 갖고 계속 일할 수 있느냐가 변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땅콩 회항’ 사태는 60개 대기업 직원 대상의 인터넷 사이트 ‘블라인드’에 오른 글이 공개의 시초였다고 한다. 그 글의 제목은 ‘내려’였다. 구름 위에 살던 조 전 부사장은 이제 일반 사회로 내려와야 한다.


조호연 | 논설위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