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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일 전 정부 관계자의 전화를 받았다. 대뜸 “세제발전심의위원회에 참석할 거냐”고 물었다. 심의위원을 자원한 터도 아니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명단에 포함됐냐고 묻자 “언론계 대표 4명 중 한 명으로 들어있다”고 했다. 나라 살림살이가 걸린 세제 개편안을 다루면서 이렇게 심의위원을 뽑는지 의아했다. 연락이 없다가 심의위 하루 전 참석 여부를 재차 물었다. 황당했다. 세법 개정안이 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참석하라니. 담당자에게 “세법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아야 뭐라고 얘기라도 할 게 아니냐”고 따졌다. 그는 “보안 때문에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공청회나 다른 위원회도 다들 그렇게 하는데…”라며 당연하다는 투다. 정부 산하 위원회가 통과의례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가 싶었다.

세제발전심의위는 올해로 47번째를 맞은 정부의 공식 자문기구다. 세제 개편은 예산과 함께 정부의 연례행사 중 가장 비중이 큰 행사다. 세제 개편안은 위원회 의결을 거쳐 확정짓도록 돼 있다. 심의위원 면모만 봐도 화려하다. 위원장은 경제부총리와 대한상의 회장이 공동대표다. 재계·업계 대표와 시민단체, 경제학 교수, 변호·회계사, 경제연구소, 언론계 인사가 망라돼 있다. 외형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기재부 세제실장을 지낸 인사만 3명이다. 국세청 간부나 국책 연구기관 출신도 상당수다. 정부에 쓴 소리를 할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왼쪽)가 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제47차 세제발전심의위원회 회의 도중 박용만 위원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실제 회의장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 6일 열린 심의위는 최경환 부총리 주재의 오찬이 끝난 뒤 오후 1시30분에 시작됐다.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뒤 최 부총리는 “선약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비공개로 시작된 회의는 예상대로였다. 40여명의 심의위원이 참석했으니 애초 토론은 불가능한 분위기다. 개별 위원별로 할당된 시간은 5분이 채 안됐다. 업계 대표로 나온 한 심의위원은 “부동산 세금을 더 깎아주고 정부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시민단체 대표는 “개정안이 말만 가계소득 증대일 뿐 실상은 대기업과 금융 자산가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설계돼 있다”고 따졌지만 묵묵부답이다. 정부의 부연 설명이나 대안 논의는커녕 다들 자기 얘기뿐이다. 발언이 길어지자 박용만 위원장이 나서 “시간이 한정돼 있다”며 재촉했다. 이후 심의는 일사천리였다. 대부분 “정부 개정안 취지에 공감하며…”라는 판에 박힌 얘기가 주를 이뤘다.

발언 순서를 기다리며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당을 늘리기 위해 배당소득에 붙는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논리의 허구성부터 따졌다. 박 위원장에게 “정부는 대주주들이 양도소득세보다 배당소득에 대한 세금이 비싸 현금배당을 꺼린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어봤다. 사실 대주주는 지배구조를 유지하려면 계열사 주식을 팔 여유가 없다. 그런데도 주식 양도소득세보다 배당 세율이 높아 배당을 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억지나 다름없다. 덧붙여 “백번 양보하더라도 배당수익에 세금 깎아주는 게 서민경제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다. 주식시장의 개인투자자는 23.6%에 불과하다. 배당이 늘면 외국인(32.9%)이나 일반 법인(24.1%)이 더 혜택을 받는다. 개미들 역시 그나마 여윳돈 굴리면서 살 만한 사람들이다. 세제 혜택이 간절한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근로자 임금을 올려주면 세제 혜택을 주는 제도 역시 실효성이 의문이다. 임금 100원 올려주면 5원의 세금 혜택을 주겠다는데 95원 손해보면서 임금 올려줄 기업이 어디 있을까. 몇 마디 하고는 자리를 떴다.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참석자들에게 물었더니 세제 심의는 그렇게 2시간여 만에 끝났다고 한다. 정부가 나눠준 1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설명자료는 읽어볼 새도 없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정부는 위원회 타령이다. 군의 구타 사망사고가 지면을 장식하는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 산하의 각종 위원회는 지금도 차고 넘친다. 남북관계발전위, 지역발전위, 사회보장심의위, 관광정책심의위, 문화융성위…. 일일이 열거하는 데도 숨이 찰 지경이다. 그야말로 위원회 천국이다.

사실 세제 개편안에 대한 언론 브리핑은 심의위가 열리기 3일 전에 이미 끝났다. 세제 심의에서는 토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당일 방송뉴스와 다음날 조간 신문엔 “정부가 세제발전심의위원회를 열어 세제 개편안을 확정했다”는 보도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올해 세법 개정안은 누가 심의하고 확정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심의위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박문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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