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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연출가 이윤택은 1995년 연산군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문제적 인간 연산’이란 제목을 달았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연극은 조선의 제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그리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하들, 아버지 성종의 짙은 그림자 때문에 문제적 인간이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판사 교양인은 2005년부터 <문제적 인간>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목록에는 스탈린, 장칭(江靑), 히틀러, 네차예프, 괴벨스 등 사회변혁을 주도하거나 파멸로 이끈 문제적 인간들이 올라 있다. 시대와 불화하며 이념의 극단을 치달은 이들의 말로(末路)는 한결같이 비극적이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2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 질문에 생각에 잠겨 있다. 권호욱 기자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도 극단적인 이념 편향성을 보이는 문제적 인간이다. ‘한국의 매카시’로 불리는 그에게 반공이데올로기는 신념을 넘어 신앙이 된 지 오래다. 방문진을 ‘극우의 놀이터’로 만든 고영주는 MBC 경영진의 불법과 부도덕을 비호하며 방송의 극우화를 부추겼다. 그러니 MBC가 ‘부패권력 부역방송’으로 추락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문재인 정부의 첫 국정감사에서 고영주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증인 신분으로 국회에 출석한 그는 국감 보이콧을 논의하던 자유한국당 의총에 드나드는 기행(奇行)을 서슴지 않았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확증 편향’ 성향도 드러냈다. 여당 의원들이 “MBC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보느냐”고 묻자 “MBC가 정상적인 국민들로부터는 신뢰를 받고 있다”고 했다. MBC를 신뢰하지 않는 시민들은 ‘비정상적’이란 뜻이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했던 ‘배째라 소신’도 여전했다. 의원들이 “명예훼손 소송에서 문 대통령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판결이 나오면 어찌할 것이냐”고 하자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맞받았다. 지동설을 주장해 유죄판결을 받은 갈릴레이를 코스프레한 것이다. 그는 “(문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나중에 당연히 드러난다. 내가 평생 공안을 해서 안다”고 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고영주는 달라지지 않았다. 궤변은 여전했고, ‘좌파 혐오증’은 더욱 공고해졌다. 국감 질의가 끝난 뒤 삼각김밥을 나눠 먹은 김진태 한국당 의원 같은 보수세력에게 ‘아스팔트 우파의 자존심’으로 치켜세워질 만하다.

공안검사 시절 고영주는 ‘변형적 출세주의자’로 통했다. 그는 법대가 아닌 공대(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왔다. 유학을 준비하다 대학 3학년 때 부친이 세상을 뜨자 군에 입대했다. 공대 교수가 되려 했으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고 나서 법조인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1978년 청주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한 고영주는 검찰 내 공안이론가로 유명했다. 1981년 부림사건 수사검사를 맡아 용공조작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는 그는 지금도 “부림사건은 빨갱이 사건”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2006년 서울남부지검장에서 물러나면서 검찰 내부통신망에 “27년간 검사로 일하게 해준 검찰 조직에 감사한다”는 짧은 글을 남겼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노무현 정부에서 5년 내내 핍박받는 게 더러워서 그만뒀다.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검찰총장을 하고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공안검사를 그만둔 이후 고영주는 좌파척결 활동에 매진했다. 2010년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을 편찬했고, 이듬해에는 민주노동당 해산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어느 의원의 말마따나 “사법부에 김일성 장학생이 있다” “국사학자 90%가 좌편향” “세월호 유가족은 떼쓰는 사람”이란 발언은 ‘고벨스’(고영주+괴벨스)가 아니면 할 수 없다. 방송 문외한인 고영주는 2015년 8월 방문진 이사장이 됐다. 당시 그는 “이사장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맡기신 분의 뜻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맡기신 분’이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영주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방문진 이사회는 지난 2일 이사장이던 그를 불신임하고, 이사 해임 건의안도 통과시켰다. MBC를 망가뜨린 고영주의 해임사유는 차고 넘친다. 오죽하면 “방송을 강간한 범인, 사람도 아니다”(신경민 민주당 의원), “철면피, 파렴치, 양두구육”(송일준 한국PD연합회장)이란 극언까지 쏟아졌겠는가. 고영주는 방문진 이사에서 해임되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했다. 안될 일이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자경자계(自警自戒)하는 게 도리다. 고영주의 인생행로를 바꿨다는 <법의 정신>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덕성에는 품위, 습속에는 솔직함, 행동에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 그에게 묻는다. 언제까지 품위와 솔직함, 예의를 잃은 문제적 인간으로 남아 있을 셈인가.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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