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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공장 내부에 설치된 고화질 카메라가 조립 공정을 꼼꼼하게 훑고 지나간다. 움직이는 물체의 대부분은 기계장치이다. 유려하고 반짝이는 근육질의 기계 팔들이 부품을 정확하게 집어 필요한 곳으로 옮긴 후 나사를 조이거나 용접을 하고, 도색 작업으로 마무리한다. 기계 팔들의 정밀한 움직임은 이미 인간이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다. 화면에 잡힌 인간 노동자들은 대개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거나, 심지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빈둥대고 있다. 지난주에 끝난 백남준아트센터 기획전 ‘우리의 밝은 미래-사이버네틱 환상’의 일부로 전시된 박경근 작가의 작품 ‘1.6초’의 일부이다. 작가는 “공장에서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것은 로봇이고 생기 없는 회색빛의 얼굴은 인간”이라고 지적한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실업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최근 높아졌지만, 사실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수학자 노버트 위너(1894~1964)가 이미 예측했던 일이었다. 그는 17세였던 191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집합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정보의 피드백을 통해 기계장치를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대공포 사격을 자동화하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적기가 빠른 속도로 날아올 경우 인간의 제한된 인지능력만으로 대공포를 조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비행기의 과거 움직임으로부터 근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해 자동으로 조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위너는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정보의 피드백을 중심으로 한 기계장치의 작동 원리가 동물 또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 더 나아가 인간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과 근본적인 의미에서 동일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는 <사이버네틱스>(1948)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설파했다.

위너는 이 책의 서문에서 2차대전을 통해 발전된 기계·컴퓨터 기술을 통해 “이미 거의 모든 수준의 정교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인공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인간 노동자가 필요없는 자동화된 조립 공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위너는 이와 같은 기술적 변화를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다. 첫 번째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력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었다면, 20세기 중반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인간의 두뇌를 대체할 것이었다. 첫 번째 산업혁명을 통해 다수의 육체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듯, 두 번째 산업혁명이 완수된다면 사무직 노동자와 과학자들 중에서 “평균 이하의 성과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게 될 것이다”. 위너는 자신이 목도하고 있는 20세기 중반의 기술 변화가 가져올 사회적 충격에 대해 경고했다.

위너가 1948년에 던졌던 경고는 2017년 현재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그의 시기 구분에 따르자면 우리는 1948년 무렵 시작된 ‘2차 산업혁명’의 영향력하에 살고 있다. 위너가 사이버네틱스를 구상할 무렵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고 디지털 컴퓨터가 개발되어 이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들어 트랜지스터는 집적회로로 만들어져 밀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18개월에 두 배씩 반도체 칩의 성능이 높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컴퓨터 성능이 고도화되고 인터넷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데이터의 생산과 수집 과정이 획기적으로 변화했고, 이는 한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있었던 인공지능 기술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위너는 집적회로가 처음 개발된 직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의 변화에 대해 그리 놀랐을 것 같지는 않다.

위너의 구분을 받아들인다면 1980년대 이후 나타난 각종 시기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인간과 기계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는 이미 20세기 중반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담론은 시기 구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정부의 의제 설정이라는 의미가 크다(맹미선 <‘알파고 쇼크’와 ‘4차 산업혁명’ 담론의 확산> 참조).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담론은 과거의 정보화 사회, 녹색성장, 창조경제 등 정치적 유행어들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행어를 기준으로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오히려 우리는 해당 유행어가 제시하는 미래의 모습과 그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의 자원을 재배분하는 정치적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를 주창하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테크놀로지가 가지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사이버네틱스가 이루어낼 2차 산업혁명이라는 미래가 “선과 악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그 미래는 인류의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계 노예”들을 제공해줄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예 노동력과의 경쟁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모든 노동력은 노예 노동력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노예 노동”과 다르지 않게 될 것이었다. 편안한 노예의 처지가 되는 미래를 받아들일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을 찾을 것인가? 위너가 1948년에 제기했던 오래된 문제가 이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최형섭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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