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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본래의 좋은 성질이 바뀐 환경 때문에 나빠진 경우를 묘사하려고 자주 인용된다. “한국에 태어났다면”이라는 도입구로 시작되는 집단창작물은 귤화위지의 인터넷판이라 할 수 있다. 귤화위지는 “아인슈타인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대학입시에서 낙방했을 것이다”라든가 “마리 퀴리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봉제공장 미싱사가 되었을 것이다” 등으로 응용되어 무한확장된다.

“회수를 건넜더니” ‘귤화위지’되기는커녕 ‘청출어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양의 포크커틀릿이 동양에 건너와 돈가스로 변신했지만, 돈가스의 맛은 포크커틀릿 그 이상이다. ‘차폰(吃飯)’이 바다를 건너면 ‘잔폰(ちゃんぽん)’이 되고, ‘잔폰’이 다시 한번 바다를 건넜더니 ‘짬뽕’으로 변하기도 한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개성을 지닌 음식이 “회수를 건넜기에” 탄생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02년 문을 연 손탁호텔에 있던 정동구락부가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 한국은 카페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시 곳곳에 카페가 있다. 카페는 처음 등장했을 때 유럽에서는 문예 비평의 중심지이자 시민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 비평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그 카페가 “회수를 건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카페는 한국의 환경에 적응하며 변주되어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 하여 ‘카공족’이라 부르는 한국형 도시부족을 낳았다.

공부를 위한 공간이 아닌 카페에 장시간 죽치고 앉아 테이블 회전율을 떨어뜨리는 민폐족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는 ‘카공족’을 관찰하기 위해 서울에서 가장 큰 대형서점 근처의 카페를 찾아갔다.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카페에 있지만 의외로 조용하다. 도서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더 많다. ‘카공족’의 일원이 되어 카페에서 공부하며 각양각색의 ‘카공족’을 살펴봤다.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자칭 ‘카공족’인 사람에게 카페에서 공부하는 까닭을 물었다.

‘카공족’이 아닌 사람에게 ‘카공족’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 집단처럼 보이지만 ‘카공족’이 된 저마다의 속사정은 다르다. ‘카공족’은 단일한 집단이라기보다 팔색조에 가까운 다채로운 도시부족이다. “~라 쓰고 ~라 읽는다”는 인터넷 이디엄을 ‘카공족’ 각자의 사정을 해독하기 위해 빌려온다.

삼복더위가 찾아왔는데도 집에 에어컨이 없거나,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요금 청구서가 두려운 사람, 겨울이어도 햇볕이 한 줌도 들지 않는 반지하에 사는 사람은 카페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이 경우 ‘카공족’이라 쓰고, 주거문제라 읽어야 한다. 다국적 카페가 도시인 자격을 부여하는 듯한 막연한 느낌이 좋아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카공족’이라 쓰고 힙스터 강박이라는 도시질병으로 읽어야 하는 경우다. 근처에 도서관이 없어서 가까운 카페에서 공부하기도 한다. ‘카공족’이라 쓰고 공공도서관 부족이라고 읽어야 한다.      

가사노동 압박 때문에 집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서 카페를 찾는 사람도 있다. ‘카공족’이라 쓰고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겨진 가사노동이라 읽는다. 프리랜서 재택근무자는 출근하는 느낌으로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간다. ‘카공족’이라 쓰고 숨겨진 작업장이라 읽는다. 무조건적인 정숙을 강요하는 질서정연하게 책상이 배치되어 있는 도서관이 갑갑한 사람은 테이블이 무정형으로 배치되고 높은 천장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카페에서 공부한다. ‘카공족’이라 쓰고 도시의 카라반이라 읽고 싶은 사례이다.

도서관에선 노트북용 콘센트는 희귀재이나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넘쳐흐르고 무료 와이파이까지 제공되는 카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하는 사람, 높은 토익점수를 따려고 반복노동이 되어버린 한국형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이 경우 ‘카공족’이라 쓰고 스펙 사회라 읽는다. 스펙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지겨운 사람은 카페에서 동일한 처지의 사람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위안을 얻는다. ‘카공족’이라 쓰고 쉼터라 읽어야 하는 경우다. ‘카공족’이 되고 싶어도 경제적 부담이 커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카공족’이라 쓰고 소득불평등이라 읽는다. ‘카공족’을 관찰한다는 핑계로 카페를 찾은 나는 반복 구매자에게 증정하는 다이어리에 한층 다가섰음을 느끼며 기뻐했다. ‘카공족’이라 쓰고 시지푸스적 욕망에 포획된 소비자라고 읽었다.

이 다양한 사정의 ‘카공족’ 중 어떤 ‘카공족’이 미래를 지배할지 아직은 모른다. ‘카공족’의 미래는 ‘카공족’을 낳은 환경의 미래에 달려 있다. ‘카공족’이 ‘탱자’인지 ‘청출어람’인지도 그때 최종 판가름날 것이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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