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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게 생겼다.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해의 이야기니까 벌써 36년 전, 1981년의 이야기다. 그래도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것은 대학입시의 기억이 온몸에 새겨진 듯 생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네시간 자면 합격, 다섯시간 자면 불합격. 그래서 밤을 새우기 위해 독서실에 다니던 기억. 당시까지만 해도 통금이 있어서 새벽 네시 통금이 해제되는 시간에야 독서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 스산한 새벽거리를 걷던 기억, 졸면서 쓰러질 듯이 만원버스에 시달려가며 학교에 가던 기억,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침으로 범벅이 되게 만들며 책상에 엎어져 잠들었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사는 건가 싶던 기억.

서울 대치동 학원거리에서 학생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합격이 되면 다행이겠으나 떨어지면 통째로 잃어버릴 시간들이었다.

나는 학력고사 시대에 대학에 들어갔고, 또 졸업정원제 세대이기도 했다. 민망하게 고백하자면, 졸업정원제 혜택을 대단히 봤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입학정원을 졸업정원의 30% 이상 선발해 졸업 때까지 그 30%를 탈락시키겠다는 것이 졸업정원제의 취지다. 대학을 공부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그 목적이 실은 대학 내 반정부 학생운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았다.

놀라울 것도 없이, 학생운동은 불어난 인원만큼이나 배가되었다. 내가 졸업정원제의 혜택을 받았다는 것은 늘어난 30%의 입학정원에 해당되어 원하던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하여 그때까지는 입시에 파묻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었던 시대의 이면을 마침내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렇다.

졸업정원제가 계속 시행되던 1983년, 84년 캠퍼스는 학생들로 넘쳐났고, 그 넘쳐나는 학생들은 넘쳐나는 물결처럼 시위대열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6·10항쟁이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다른가.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시위의 현장은 대학 캠퍼스가 아니라 촛불이 빛나는 광장이 되었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있을 때, 광화문광장에는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대단히 많았다. 그들은 피켓을 들고 있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집회가 끝난 후에는 쓰레기도 치웠다. 억눌려 있는 목소리,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일지도 모른다. 아직 발을 담가보지도 못한 사회, 그들로서는 아무 잘못도 보태지 않은 사회, 그 사회의 부조리함이 그들의 인생을 통째로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얘기해서 뭐하나. 그 아름다운 10대, 그 찬란한 10대를 학생답게만 사는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사회, 그런 세상에 대한 외침인 것이다.

오래전 한국 순방길에 올랐던 해외 외교사절을 수행했던 한 교포가 들려줬던 일화가 있다. 한국이 그토록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묻는 그 외교사절에게 그가 자랑스럽게 한 대답은 ‘교육’이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밥은 굶어도 책은 사줬다. 그때 그에게 질문을 했던 외교사절의 나라는 어머니들이 돈이 있다면 축구공을 사주는 곳이라고 했다.

한 나라의 발전과 성장이 단지 축구공과 책의 차이일 리는 없다. 어머니들이 축구공 대신 책을 사줬다고 해서 크게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도 아니다. 그 책이 그저 참고서나 문제집이기만 했다면 더욱 그렇다. 한 나라의 성장동력이 교육에 있다는 말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교육이라는 말이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느냐는 데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의 교육환경은 외국인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언제 놀아요’가 아니라 ‘언제 살아요’라고 물어야 할 수준이다.

불행히도, 교육환경은 35년 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때와 거의 달라보이지가 않는다. 입시의 이름이 바뀌었고, 입시의 항목이 바뀌었을 뿐, 아이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통째로 저당 잡히고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나온 것은 정말 까마득히 옛날의 일이고, 그 영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그 영민한 주인공이 살았다면 지금은 기성세대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기성세대들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오히려, 끔찍하게도, 성적순으로 붙잡을 수 있는 기회의 폭이고, 그 기회의 근본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건,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건 그런 환경에 있지 못한 사람들뿐이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 애시당초 기회에 근접할 수 없는 사람들.

오래전 그 무지막지했던 군사정권은 학생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야말로 폭력적으로 교육과 입시제도를 바꿔버렸다. 그리고 역풍을 맞았다. 그 역풍을 일으킨 주역들이 지금 정권의 중추들이고 교육정책 담당자들이다. 그들이 바꾸지 못한다면, 더 낫게 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어디에 있겠나. 촛불집회를 통해 이미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목격한 바 있다. 그 건강함이 발산되는 교육, 그게 미래가 아닌가.

35년 전, 학력고사가 끝나던 날, 소설책을 사러가던 기억이 난다. 문학소녀 취향 때문일 수도 있고, 입시가 끝났는데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동안 억눌렸던 잘난 척의 폭발일 수도 있다. 동네 서점으로 가던 그 길이 무지하게 쓸쓸하던 기억도 난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불안한 미래, 더욱 불안한 앞날. 그래서 울음이 터질 것 같던 기억. 한순간에 모든 걸 털어버리기에는 그동안 바쳤던 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일 내 10대의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수능이 일주일 앞이다. 학생들과 부모님들의 노고에 위로와 박수를 보낸다. 꿋꿋이 버티시기를 바란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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