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살다가 소송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전관 변호사를 구해야 한다. 전관 변호사들이라고 해서 패소를 승소로, 유죄를 무죄로 바꿔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판사 출신의 전관 변호사를 쓰면 재판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법정에서 할 말을 다 할 수 있고, 증거를 봐달라는 요청이 잘 받아들여진다. 재판에 미련이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 재판이 빠르게 진행된다. 세상의 모든 진실과 권리, 행복마저 시간과 함께 소멸한다. 가게 하다 떼인 돈은 5년이 지나면 내 돈이 아니고, 어렵게 소송을 하더라도 판사가 3년만 끌면 가정부터 엉망이 된다. 재판의 속도는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판사는 미뤄서 조진다는 말이 그래서 있다.

미뤄 조지기의 정점에 대법관이 있다. 지난 4월 대법원은 4년 넘게 끌어온 18대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 사건을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의 결론을 내릴 실익이 없어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미 (지난달) 헌법재판소 탄핵 인용 결정으로 파면돼 지난 대선의 무효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다”고 했다. 선거소송은 대법원이 1심이자 최종심이므로 재판을 열어야 했다. 김창석 대법관은 주심으로서 직무유기한 것이다. 대법원이 선거를 무효로 결론 내지도 않을 거면서, 사건을 오래 쥐고 있던 이유가 뭘까. 박근혜 청와대를 겁주려 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대법원은 소심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곳이다. 선거무효 소송의 쟁점은 국가정보원이 심리전단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는지다. 2012년 원세훈 국정원의 선거개입 전모는 2013년 윤석열 검사의 수사와 2015년 김상환 판사의 판결로 사실상 드러났다. 대법원은 이것이 대선을 무효로 할 일인지 판단해야 됐다. 하지만 2015년 대법원은 원세훈 사건이 오자 유죄인지도 무죄인지도 밝히지 않고 파기부터 했다. 반대가 없는데도 전원합의체를 소집해 전원일치로 시간끌기 결론을 냈다. 이런 금시초문 판결의 재판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다. 그러다 정치상황이 급변해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자, 대법원은 대선무효 사건을 각하해버렸다.

이런 의혹의 시절을 살아온 사내가 있다. MBC 해직기자 이용마다. 2012년 김재철 사장에게 공정한 방송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주도했다. 이를 이유로 정영하, 최승호, 박성제, 박성호, 강지웅과 함께 해고됐다. 다른 38명은 정직 등 징계를 받았다. 이용마는 해고가 무효라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에 맞서 박근혜 정부는 이들을 업무방해로 기소했고, MBC 사측은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이들 재판에서 이용마는 모두 이겼다. 해고처분은 무효이고, 업무방해는 무죄이며, 손해배상은 기각됐다. 각각의 1심과 2심 모두, 즉 6개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했다.

세 항소심 재판장들인 김대웅, 김상준, 김우진 판사는 하나같이 밝혔다. “문화방송은 방송법 등의 관계법령 및 단체협약에 의하여 인정된 공정방송의 의무를 위반하고 그 구성원들의 방송의 자유를 침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인 근로자의 구체적인 근로환경 또는 근로조건을 악화시켰다 할 것이므로, 피고인들을 비롯한 문화방송의 근로자들은 그 시정을 구하기 위한 쟁의행위에 나아갈 수 있다.” 판결들이 나온 때가 2015년 4·5·6월이다. 대법원은 이번에도 사건을 쥐고 3년째에 들어섰다. 그러던 지난해 9월 이용마는 복막암을 진단받고 길어야 16개월이란 통보를 받는다.

어린 두 아들을 위해 이용마는 글을 남겼다. “나의 꿈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너희들이 앞으로 무엇을 하든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다. 그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의 인생도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이 사건을 거머쥐고 어설픈 정치판단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공동체가 병들어가고 있다.

<사회부|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