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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된 모양이다. ‘이명박 심판을 위한 범국민 행동본부’와 ‘무궁화클럽’이라는 단체가 이 전 대통령이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발설해서는 안될 기밀들을 공개했다며 문제를 삼았다. 이들은 지난 9일 이 전 대통령을 공무상 비밀누설과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기시감(旣視感)이 있지 않은가. 이 전 대통령은 기억이 용탈됐는지, 언급하기가 껄끄러웠는지 회고록에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2008년 7월12일 ‘국민의병단’이라는 단체가 기밀사항이 담긴 국가기록물을 불법으로 유출했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절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12일 뒤인 24일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노 전 대통령과 대통령기록물 인수·인계 관련자 전원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같은 날 이명박 정부도 기록물 반환 실무자 10명을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이른바 ‘노무현 전 대통령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유야무야됐다. 사법적 판단을 받기 이전에 검찰 선에서 사건을 종결한 것이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실무자들에 대해서는 무혐의와 기소유예 처분을 각각 내렸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 사저로 e지원시스템을 복제의 방법으로 사본을 제작해 간 것이 불법 유출이냐, 열람권 확보를 위한 정당한 조치냐 하는 문제는 논란으로만 남긴 채.

노 전 대통령은 억울하다. 대통령제하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이 체계적으로 생산·보존·활용되도록 제도화하고 실천한 첫 대통령으로서 존중은 고사하고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했다. 법적 판단이 내려지기 이전에 재임 중 기록을 불법적으로 유출해 사적으로 이용하려다 문제가 돼서 다시 국가에 반환한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 대통령의 열람권에 대한 법적 시시비비가 가려지기 전에 이미 낙인효과가 씌워졌고, 그것이 그대로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됐다.

2007년 7월 시행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특별한 의지가 가미된 제도다. 핵심은 대통령이 기록을 생산해서 남기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임 중 생산한 기록에 대한 확실한 보호 장치와 퇴임 후 그것을 언제든 볼 수 있는 권한이 필요했다. 바로 지정기록물제도와 열람권이다. 민감한 기록을 생산하게 만들고 또 그것을 파기하거나 사저로 가져가지 않게 하는 일종의 유인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두 가지 핵심 제도를 철저히 유린했다. 당시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대통령기록물을 유출한 것은 실정법상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몰아붙였고 “유출된 기록물이 사본이 아니라 원본”이라며 사실 왜곡까지 했다. 한나라당에서는 업무의 연속성을 위해 전임 대통령이 생산한 지정기록물을 후임 대통령이 열람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하겠다는 황당한 움직임까지 있었다. 노 전 대통령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과 그 뒤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태 등을 통해 대통령기록이 노골적으로 정쟁의 도구가 되고 지정기록물 봉인이 수차례 뜯겨져 만신창이가 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경기도 성남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내 대통령지정기록서고 (출처 : 경향DB)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두 가지 핵심 요소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 과도하게 지정기록물을 지정해 아무도 못 보게 봉인해놓고는 회고록을 통해 그 내용을 공개한 것이 그런 모습이다. 회고록은 이 전 대통령과 참모들의 기억과 메모를 바탕으로 썼으며, 대리인이 대통령기록관에서 여러 차례 기록을 열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지정기록물이나 비밀로 분류해 이관해야 할 기록을 빼돌렸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고약하긴 하지만 이를 확인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또다시 검찰의 손을 빌려 대통령기록의 봉인을 여는 것은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짓이다. 지금이라도 대통령기록은 철저히 보호하는 선례를 쌓아 청와대 기록이 풍성하게 생산될 수 있도록 풍토를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열람권도 다양하고 충분하게 보장해 퇴임하면서 기록을 빼돌리는 일은 물론 그런 의심을 받을 여지조차 없애야 한다.

재미 저술가 이흥환씨가 미국 국가기록시스템을 다룬 저서 <대통령의 욕조>에서 아카이브와 프롤로그는 동의어라고 말한 대목이 인상 깊다. 아카이브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얼마나 잘못 시작됐는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야기한, 그리고 야기하고 있는 각종 기록사건이 잘 말해준다. 시작이 잘못됐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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