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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최고 비밀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이 특정 후보를 위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을 상대로 심리전을 벌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서울고등법원 판결의 요지는 이렇게 간명하다. 지난 대선 막바지에 터진 댓글사건은 검찰총장을 위시한 검찰조직의 핵심부를 초토화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댔다. 그리고 1심에서 빠져나가는 듯했던 원세훈은 징역 3년의 선고를 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정작 주범 격인 국정원은 의연히 안전하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이 국정원장을 고리로 삼아 특정 정치권력에 완전히 종속됨으로써 야기된 것이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달린 국정원장이 조직을 이용하여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자체를 부정해버린 중대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의 공식 조직은 그 어떠한 자기통제도 자기반성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이 권력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사유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기에 진정 처벌받아야 할 자는 국민을 적으로 삼아 교묘한 심리전을 벌인 국정원 그 자체여야 한다.

국정원이 심리전단을 만든 이유는 언제나 그렇듯이 북한의 사이버전에 대한 대응 필요성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굳이 비밀정보기관인 국정원이라는 점에서 현 체제의 고질적 병폐가 생겨난다. 국정원은 다른 건 몰라도 예산과 조직과 활동의 비밀성이라는 점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대통령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곳이 국정원이다. 심지어 국정원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회의 정보위원회조차도 함부로 엿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비밀성 속에서 국정원은 특정한 정치집단에 사유화되고 그에만 충성하는, 맹목의 노비로 전락한다.

실제 이 판결에서 보듯 국정원은 국가안보를 정권 재창출과 같은 개념으로 변형하였다. 또 적대의 대상인 ‘북한’은 ‘종북’ 혹은 ‘종북좌파’라는 말로 대체하고, 이를 다시 정권 반대세력이나 (특정) 정책 비판집단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물론 이런 비약은 아무런 근거도 연결점도 없다. 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댓글들은 연쇄하강효과(cascade effect)로 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하버드 법대의 선스타인 교수가 지적하듯,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다수 의견이나 집단적 의견을 추종하여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잘못된 정보에 기반을 둔 극단적인 의견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널리 확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리전단의 댓글작업은 이런 정치적 편견들을 다수의 의견인 양 포장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추종하게끔 유도했다. 혹은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 끝없는 반목과 갈등의 상태로 몰아넣고 그 속에서 정치적 이득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원세훈의 지시처럼 “인터넷 자체를 청소”하여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를 마치 대한민국의 안보문제로 오인하게 만들고, 그에 비판적인 이념이나 주장들은 종북좌파의 그것으로 간주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대국민 심리전술은 해방 이래 지속되어온 반공지상주의를 등에 업은 기존의 정치세력들이 영구히 지속가능하게끔 만든다. 통합진보당 정도의 소수정파도 허용되지 않는 굳건한 이념적 장벽은 그들만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독점할 수 있게 허용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국정원의 소위 ‘셀프개혁안’을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국내심리전은 폐지하고 대북심리전에 주력하겠다는 방안은 ‘체제비판=종북=북한 추종’이라는 이상한 공식하에서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기 십상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가 10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전날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인정하는 판결에 대해 "강도 높은 국정원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이며 근본적 대책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출처 : 경향DB)


그러기에 이 판결 직후 한 야당이 “뼈를 깎는 국정원 개혁”을 다짐하며 내놓은 조건반사적인 코멘트는 너무도 공허하다. 이 사건에서 국정원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한 것은 대선에 개입해서만은 아니다. 더 큰 죄책은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 자체를 왜곡하고 호도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경직된 극단주의로 몰아갔음에 있다. 진정한 야당이라면 이 점을 “뼈를 깎는” 아픔으로 통찰하여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의 해산 결정에서 우리 헌법의 지향점을 “민주적 입헌주의”의 실천에다 맞추었다. 하지만 그 헌법이념의 구현을 위해 진정 절실했던 것은 통합진보당의 해산이 아니라 국정원의 혁파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새로운 체제로 재편되는 야당의 첫걸음을 내딛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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