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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는 물론 타국의 도시 정보를 꿰뚫는 사람,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지도부터 챙기는 사람, 지도 한 장으로 몇 시간을 보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맵헤드라고 한다. 지도 마니아다. <맵헤드>(글항아리)의 저자 캔 제닝스 같은 사람이다. 제닝스는 어린 시절부터 지도를 끼고 살고 있단다. 아홉 살 때 전 세계의 수도는 물론 주요 도시를 달달 외웠다. 그는 지도를 펼치고 지명뿐 아니라 땅의 위치, 모양까지 읽는다. 스웨덴과 미국 미시간호, 그리고 탄자니아와 미 위스콘신주가 닮은꼴임을 발견한 것도 그다. <맵헤드>는 지도 마니아가 지도와 함께했던 이야기를 모은, 별난 책이다.
사람들은 왜 지도에 빠질까. 지도의 사전적 의미는 ‘지구 표면의 상태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 이를 약속된 기호로 평면에 나타낸 그림’이다. 지도가 공간의 축소라면 지도를 본다는 것은 기호를 풀어 공간을 펼쳐내는 일이다. 지도가 그림이라는 사실은 지도 보는 일에 낭만성을 더해준다. 영국 작가 엘리자베스 비숍은 “역사가들의 색보다 더 섬세한 것은 지도 제작자들의 색이다”라고 했다는데, 확실히 색채 지도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맵헤드들이 회화적 요소가 강한 고지도에 더 빠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나는 맵헤드와 거리가 멀다. 지도는 즐겨본다. 흥미 있게 들여다보는 지도는 ‘중국지형(中國地形)’이다.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지형을 요철로 표시한 입체지도인데, 처음 보는 지도여서 바로 구입했다. 울퉁불퉁한 이 지도를 보면 에베레스트산이 얼마나 높은지, 쓰촨성이 어떤 형태의 분지인지, 1500여m에 불과한 태산을 왜들 높다고 했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고지도에서는 ‘대동여지도’와 ‘해동지도’를 좋아한다. 1985년 지도제작자 이우형씨는 대동여지도를 실제 크기로 복원해 책자로 발간한 적이 있다. 이후 경희대 전통문화연구소가 대동여지도 축쇄판을 냈다. 지금은 모두 품절이다. 그나마 지난해 나온 <해설 대동여지도>가 지도 보는 재미를 안겨준다. ‘해동지도’는 1750년대 초에 제작된 조선시대 군현지도이다. 8도 지도와 전국 군현지도 수백장을 묶은 지도책이다. 회화미가 뛰어나 마치 지도 연작 그림책을 보는 것 같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원본을 1995년 영인본으로 발간해 대학·도서관 등에 보급했다. 가끔 회사 근처 서울역사박물관에 들러 ‘해동지도’를 펼친다.
대규모 고지도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난주 광복절 공휴일에 용산의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일단 전시된 작품의 양이 놀라웠다. 지도 130점을 비롯해 지리지, 목판 등 모두 260여점이 출품됐다고 한다. 국내 지도 전시 사상 가장 큰 규모다. 전시장에 나온 지도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 자료가 많다. 대동여지도는 22개 첩을 이어붙여 바닥에 누이니 가로 6.7m, 세로 3.8m나 돼 전시실 한 칸을 온전히 채웠다. 대동여지도 목판, 인출본 등도 선보여 지도 제작과정을 살필 수 있다. 대동여지도 탄생의 밑거름이 된 정상기의 동국대지도는 강과 산은 물론 감영, 성곽, 산성, 봉수 등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빼어나다. 영조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해동지도’가 나오지 못해서인지 경주읍내전도, 무장현지도(전북 고창), 철옹성전도(평북 영변)와 같은 읍현지도에 더 관심이 갔다. 철옹성전도를 보면 왜 영변을 철옹성이라고 불렀는지, 북한이 왜 그곳에 핵시설을 만들었는지 짐작이 간다. 박물관 측의 설명대로, 전시장을 둘러보면 조선은 대동여지도에 앞서 빼어난 지도들을 만든 ‘지도의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대표하는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강리도)’이다. 1402년 제작된 강리도는 세계 학계에서 이미 ‘동아시아 최초의 진정한 세계지도’로 평가를 받았다. 지도 역사의 권위자 제리 브로턴은 <욕망하는 지도>에서 강리도를 12대 세계지도로 꼽으면서, ‘새롭게 태어난 조선을 제국의 반열에 올린 지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앙박물관의 지도 특별전의 이름은 ‘지도 예찬’이다. 역사가 시간을 파악한다면 지도는 공간을 인식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이해하는 편리한 도구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지도는 가치가 있다. 조선 시대 국방, 외교, 교양을 목적으로 만든 빼어난 옛 지도들은 상찬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지도의 나라’는 이제 먼 나라의 일이 되었다. 경주읍내전도와 무장현지도와 같은 아름다운 시·군 지도는 더 이상 없다. 온통 도로·관광·맛·등산지도와 같은 실용·상업용 지도뿐이다. 역사와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정부나 지자체가 지도 제작에 나서보자. 구글어스와 구글맵, 내비게이션이 있는데, 무슨 지도 타령이냐고 타박하면 더 할 말은 없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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