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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가 도입된 사연은 눈물겹다. 산업혁명 이후 편물기계 보급이 확산되면서 19세기 말부터 섬유산업이 급성장했다. 양털로 만든 스웨터가 대중화된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 스웨터 제조업체들은 주문이 밀려들자 일감을 여성과 어린이들이 일했던 하청업체에 넘겼다. 노동자들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일한 곳은 ‘스웨트 숍(sweat shop)’으로 불렸다. 노동자의 ‘땀’을 짜낼 정도로 착취가 심한 곳이란 뜻이다.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 스웨터에는 ‘일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스웨트 숍’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호주 멜버른에선 1895년 ‘전국안티스웨팅연맹(NASL)’이 출범했다. 영국에서도 1906년 같은 이름의 시민단체가 생겼다. 두 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과 중산층이었다. 이들은 스웨트 숍의 노동착취 실태를 고발했고, 최저임금 법제화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1928년 조약으로 채택한 최저임금제는 전 세계 90%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만큼 격렬한 논쟁을 부른 정책도 드물다. 신자유주의에 매몰된 경제학자들은 일자리를 줄이고 노동시장을 교란하는 ‘주범’으로 최저임금제를 지목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은 최저임금 옹호론자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실증적 근거는 미약하다. 앨런 크루거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데이비드 카드 UC버클리대 교수는 1994년 최저임금을 20%가량 올린 뉴저지주와 동결한 펜실베이니아주의 패스트푸드 업체를 분석했다. 두 교수는 뉴저지주의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주의 초과 이윤을 줄이는 대신 고용을 늘리고 소득분배를 강화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저임금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은 인권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임금이기 때문이다. 그런 최저임금이 한국 사회에선 함부로 걷어차이고 있다. 지난해보다 16.4% 오른 지 한 달 만에 만신창이가 됐다. 편의점·프랜차이즈 가맹점 등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가게 문을 닫게 될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숨만 쉬어도 돈을 번다는 건물주가 꼬박꼬박 올리는 임대료, 매출액의 30%가 넘는 로열티, 카드 수수료 등으로 목이 졸리면서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죽을 맛이라고 한다. 적립금만 수천억원에 달하는 연세·홍익·동국대 등은 청소노동자를 단시간 계약직으로 교체하고 있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정부가 지급하는 일자리안정자금(1인당 13만원)을 받기 위해 경비원 월급을 189만원에 맞췄다. 대기업의 납품·협력업체는 상여금을 기본급에 다달이 쪼개 넣는 방식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무력화하고 있다. 꼼수와 편법을 동원한 ‘최저임금 도둑질’이다.

보수언론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의 극단을 보여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역설’ ‘을과 을의 전쟁’이란 프레임을 짜며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내놨던 보수야당들은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꿨다. “최저임금 인상은 반(反)서민, 반(反)청년 정책”(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최저임금 부작용이 하늘을 찌른다”(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며 최저임금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서슴지 않는다. 후안무치의 극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3대 실정(失政)으로 ‘최강비(최저임금·강남 집값·비트코인)’를 꼽으면서 최저임금을 맨 앞에 세웠다. 보수세력의 주장대로라면 최저임금이 1만원으로 인상되면 나라가 망할 것만 같다.

최저임금이 여느 해보다 큰 폭으로 올랐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빈곤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최저임금 대상 노동자 462만여명이 시급 7530원을 적용받아 한 달에 209시간을 일하면 157만원을 받는다. 1인 가구 표준생계비(216만원)의 73% 수준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 성장과 내수 활성화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또한 착각일 수 있다. 그런 효과가 나타나려면 최저임금이 표준생계비 수준으로 올라야 한다. 최저임금은 노동빈곤층의 구제수단일 뿐이지 성장전략은 될 수 없다.

최저임금은 가장 그늘지고 추운 곳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연탄과도 같다. 그러니 함부로 차서는 안된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했던 적이 없었던 한국 사회에 최저임금이 묻고 있다. “120여년 전 ‘스웨트 숍’에서 죽도록 일했던 저임금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을 알기나 하는가.”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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