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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에 있는 황석산에 갔다가 개인적으로 엄청난 역사의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황석산은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동남방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에 비수처럼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정상(1192m)에 오르면 그 험준함과 장쾌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지난달 10일(음력 8월17일) 그곳에 올랐을 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은 장탄식이었다. 자연 풍광을 압도하는 역사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서다. 417년 전 그날 밤 황석산성에 있었던 마지막 전투 말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관련 사학자나 해당 지역민이 아니고서는 잘 알기 어렵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남원성 전투나 명량 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을뿐더러 연구도 빈약하고 자료도 귀하다. 남원성 전투의 만인의총, 명량 해전의 이순신 장군 등과 같은 강력한 상징물이나 영웅이 부각될 기회가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황석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육십령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 중의 요충이다. 그 위 천길 암벽 위에 쌓은 황석산성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함락할 수 없는 요새 중의 요새다. 예비역 소령 출신으로 10여년 동안 황석산성 전투를 연구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의 말이다. 군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황석산에 올라 성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남 함양 황석산의 영.호남의 관문 역할을 한 육십령을 감시할 수 있는 황석산성 (출처 : 경향DB)



1597년 조선을 재침한 왜군은 임진년 침략 때와 달리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4만 대군을 좌·우군으로 나눠 우기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대장으로 한 4만5000여명의 좌군은 하동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북상한 뒤 전라도를 점령하고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대장으로 한 7만5000여명의 우군은 합천-안음을 거쳐 전주성에서 좌군과 합세한다는 작전이었다. 좌군은 남원성에서, 우군은 황석산성에서 조선군과 각각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도 이를 어느 정도는 예견한 듯하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1596년 11월 안음·거창·함양 등지에 청야작전(주변의 모든 주민과 식량을 성 안에 집중시켜 왜군을 고립시키고 기아에 빠지게 함)을 하달하고 안음현감 곽준을 수성장에 임명해 축성과 전투 준비를 하게끔 했다. 곽재우의 당숙으로 임진년 의병 출신이기도 한 그는 함양군수 조종도, 거창좌수 유명개 등과 함께 착실히 결전에 대비했다.

왜군과의 교전이 이루어진 것은 그해 음력 8월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 동안이었다. 산성에는 안음·거창현과 함양군 등 7개 군·현에서 백성과 관리, 관군 등 7000여명이 입성했다. 말하자면 명나라나 조선 정규군의 지원이 전혀 없는 가운데 지방관과 백성으로 구성된 의병이 그 10배가 넘는 왜군과 대적한 셈이다. 백성 가운데 부녀자와 시비(侍婢)·가노(家奴)까지 전투에 가담했다. 이들은 성이 함락될 때 끝까지 싸우다 왜군에 도륙됐으며, 옥녀부인을 비롯한 부녀자들은 마지막에 절벽에 투신하는 길을 택했다. 수성을 책임진 곽준·조종도 등 관리들도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산성 안에는 각종 시설의 흔적인 기와조각이 발길에 차이고 부녀자들이 뛰어내렸다는 피바위는 붉은빛이 선연하다.

비록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됐지만 황석산성 전투는 왜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황석산성을 함락한 우군이 불과 100㎞ 떨어진 전주성까지 진격하는 데 8일이나 걸린 점이라든가 전주성에서 우군이 2만7000명으로 재편성돼 북상한 정황 등이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박선호 소장 같은 이는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팔도 분할과 7년 임진대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라며 ‘대첩비’ 세우기를 주장할 정도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황석산성 전투는 민·관이 혼연일체되어 결사항전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에 걸맞은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 매년 성이 함락된 날인 8월18일 황암사(黃巖祠)에서 지내던 국가 제사도 일제강점기에 중단된 뒤 지금은 황석산성순국선열추모위원회(위원장 우병호)를 위시한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황석산성에서 느꼈던 답답한 심정이 다소나마 누그러진 것은 지역사회에서 일고 있는 이런 고무적인 움직임을 보고서다. 황석산성 역사 유적지 성역화 사업, 황석산성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황석산성 영화 제작 등 지역사회에서 황석산성 전투를 재조명하려는 열기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황석산성 전투가 ‘정유재란을 조기종식시킨 승전’이자 ‘백성의 전쟁’으로 평가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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