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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듣는 동안에는 살아 있는 것이다. ‘살기 힘들다’고 말하고 듣는 동안에도 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없었고 살기
힘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죽어서야 불쑥 찾아온다. 이런 갑작스러운 부고는 단절과 고립의 시공간에 쌓였을 그의 복잡한 현실에 대해
침묵한다. 이 현실에 연루됐거나 가담했던 나의 현실과 그 얼개이자 총체인 사회는 응당 미궁으로 빠지고 망각으로 탈출한다. 이
미궁의 어둠은 끝없고 망각의 고삐도 풀려 있어 속절없는 죽음의 풍문은 수시로 내 관계망을 가로지르며 말없이 사라진다.
지난해 5월 KBS에서 방영된 <한국의 고독사>는 2013년 현재 고독사한 사람이 1만1002명이라고 보도했다. 이 집계는 변변한 정부 통계가 없어 제작팀이 추정한 것이다. 정부 통계가 잡은 ‘명백한’ 고독사는 보름에서 한 달간 시신이 부패한 채 방치됐던 1717명이다. 유족이나 연고자가 나타나면 다행이나 무연고자나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한 죽음은 무연사로 ‘처리’된다. 보도대로라면 한국은 5시간마다 한 사람씩 아무도 모르게 죽는 ‘고독사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이 형용모순의 ‘사회’가 사회인지 실로 망연하다.
고독사·무연사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구조대나 열쇠수리공에게 발견된다. 시신은 경찰 감식반의 조사를 거쳐 병원 영안실로 옮겨진다. 의뢰가 있으면 유품처리 전문업체가 고인의 물건 정리와 집 안 소독을 한다. 무연고이면 정부의 ‘무연고 시체 처리규정’에 의해 장례 전문업체가 장례 없이 직장(直葬)하고 유골은 10년간 보관한 뒤 집단 매장한다. 방송을 보니 부산에서 무연사한 누군가의 묘비명은 메르스 확진 환자처럼 42번이다. 제작팀이 행적을 추적하다 안 사실은 이렇다. ‘2013년 9월 어느 날 42번은 휴대폰 스팸문자에 답신을 보낸 뒤 고독사했고 무연사 처리됐다.’ 연령별 1인가구 비중(2010~2035)_경향DB
통계청은 올해 1인 가구 비율이 27%로 4가구당 1가구라고 밝혔다. 문제는 1인 가구의 가파른 증가와 더불어 가족, 친구, 동료, 이웃 관계가 얇아졌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출구는 ‘고독사’, 입구는 ‘무연’이 됐는지 모르겠다. 무연(無緣)은 아무 인연이 없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잃어버린 실연(失緣)에 가깝다. 무연고자에게 사회는 부재하며 사후의 그를 ‘무연고 시체 처리’할 국가만 존재한다. ‘희망이 없었고 살기 힘들었다’는 사실만 남기고 떠나는 고독사·무연사의 길에 노인과 청장년 외에도 예술인이 끊이질 않는다.
이들은 왜 고독사하며 무연사하는가. 지난 6월19일 서울 성북구의 한 고시원에서 닷새 지난 주검으로 발견된 연극배우 김운하씨(본명 김창규·40)의 부고를 나는 21일 새벽 6시 문자로 접했다. “형… 내 후배 죽었어요… 나 술 취했어요… 술 먹자고 했는데… 바쁘다고 담주에 보기로 했는데….” 동문과 동료들이 장례와 노제를 치르고 화장해서 인천 바다로 떠나보낸 그의 죽음은 무연고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4년 전 1월 고독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운씨(32) 사건으로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고 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었다. 지난해 재단에 편성한 긴급복지지원 예산 81억원은 상반기에 소진될 만큼 예술인의 수요와 절박함이 훨씬 컸다. 하나 올해 창작준비금으로 이름을 바꿔 책정한 긴급복지지원 예산 110억원은 기획재정부의 승인이 나지 않아 한 푼도 집행되지 못했다. 이 돈은 변명을 닥치고 당장 집행돼야 한다. 예산 규모와 지원 절차도 생계 위기에 처한 예술인 실태에 맞춰서 말이다.
문 제는 예술인 긴급복지지원이 집행된다 해도 미궁과 망각의 사회적 구조와 체질이 그대로라는 점이다. 그 많은 관객을 만나서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이 고독하다니, 그 많은 시간에 동료들과 창작의 땀을 흘리는 사람이 무연고라니. 이 기막힌 미궁과 망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이 예술가라는 사실에서 정점을 찍는다. 가장 가난한데 가장 많은 열정을 쏟아붓고 가장 고독한데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제공하는 자, 그 ‘저주’의 이름이 예술인이다. 이들 예술인의 사후에 언론은 ‘무명’과 ‘비운’을 논하고 국가는 ‘무연고 시체 처리’ 가부를 확인한다.
대안은 없을까.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고명우, 2013)는 기본소득, 주거공동체, 협동조합을 제시한다. 지난해 5월 건설된 서울 마포구 만리동의 예술인 공공임대주택은 두 가지를 충족했다. 24가구 70여명 예술인과 가족이 주거공동체와 예술인협동조합을 선택했다. 성북구와 SH공사도 예술인 공공임대주택을 준비한다. 공공주거를 기반으로 예술인의 지역 정주와 마을 만들기가 아주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서울시와 자치구 차원의 기본소득 구상도 현실이 될 수 있다. ‘희망이 없다’고, ‘살기 힘들다’고 말하고 듣는 관계의 새로운 연고가 싹을 틔운다면 고독한 1인 가구여도 희망은 있으며 같이 살아갈 힘도 낼 수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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