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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어났다고 선생(先生)이라면 나 또한 수없이 선생 노릇을 했다. 그런데 선생 노릇이란 대체 뭔가. 그것은 뭐든지 가르치려고 드는 고약한 성미다. 이런 직성은 나이 든 내가 어린 사람보다 낫다는 고정관념과 높여 부르는 말대접에 절어 있는 정신 상태에서 비롯된다. 성실히 경청하는 자세와 모르면 모른다며 어린 사람에게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박멸해야 가능한 처신이다. 그러니까 선생 노릇은 너라는 존재는 무시하고 너의 입이 반응하는 호칭과 어감에만 촉각을 곤두세워서 ‘너를 위해 너를 바로잡겠다’는 구실을 일삼을 때 완성된다. 이런 선생 노릇은 가정, 학교, 일터, 사회 곳곳에서 여러 가면을 쓰지만 몹쓸 결론에선 같다. 자녀, 학생, 직원, 후배 등 나이와 지위가 낮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부모, 교사, 상사, 선배가 그런 선생 노릇에 물들면 나라 망조라고 염려한 이오덕 선생은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2005)를 남겼다. 책에서 ‘몸과 마음이 튼튼한 사람’을 키우는 방법들을 소상히 밝힌 선생은 자신보다 어린 너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만이 밤하늘의 별 같은 스승의 길을 간다고 썼다. 선생 노릇과 다른 ‘선생되기 12개 방법’을 요약해본다.

1. 후생(後生)을 점수 따기 노예로 만들지 말라. 문제풀이와 숙제를 많이 내는 것은 아이들을 팔고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가장 질 낮은 장사꾼 노릇이다. 2. 상을 타기 위해 특별한 아이들을 별난 방법으로 지도하는 데 정신을 쏟지 말라. 온갖 대회와 발표회는 장사꾼들이 벌이는 행사다. 이 두 가지 유혹을 이겨내는 데 집중하라고 선생은 역설했다. 3. 아이들을 마음껏 뛰놀게 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라. 4. 청소도 즐겁게 하고 일과 공부를 하나로 해라. 이것이 몸과 마음이 튼튼한 사람이 되는 모든 일들의 출발점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어 세 가지 자기표현에 대해 적었다. 5. 색칠하기 그림책을 주어 이미 어른들이 테두리만 그려놓은 그림에 색칠을 하게 하는 짓이 가장 기가 막히는 것이니 하지 말라. 6.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고 남 눈치, 어른들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할 수 있게 하라. 7. 착한 일을 한 글,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를 흉내 낸 글, 선생님이 제목을 주어서 쓰라는 줄거리를 따라 만들어낸 글 말고 자기가 한 것을, 본 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쓰게 하라. 이처럼 그림, 말, 글로 자기를 표현할 줄 알아야 튼튼한 사람의 기본이 선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쓴 항목들이다. 8. 생명의 존엄함을 가르쳐야 한다. 강아지, 고양이, 개미, 풀 낱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쳐라. 9. 민주스러운 삶을 몸에 익히고 붙여 살아가도록 훈련하라. 10. 환경을 더럽히지 않는 일을 아기 때부터 가르쳐라.

선생은 남은 두 가지를 어른됨의 의무로 마무리했다. 11. 오염 식품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지도하자. 12. 돈봉투를 받지 말자. 그리고 선생은 타락한 선배들과 싸우고 학부모들과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우라고 끝맺었다.

12일 서울 은평구 동명여자고등학교에서 한복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동명여고는 매년 졸업식에서 성년례를 같이 진행해 졸업생들이 한복을 입고 행사를 진행한다. (출처 : 경향DB)


어린이, 성년, 부부, 어버이, 스승의 날로 빼곡히 들어찬 이 5월에 다시 읽는 ‘선생되기 12개 방법’에 자화상을 비춰보니 화끈화끈하다. 나이가 벼슬이랍시고 해온 내 선생 노릇 중 온전한 게 없어서다. 나의 젊은 날과 지금 청년의 나이 값이 금값과 똥값보다 더 격차가 벌어진 이 시대에 어떻게 나는 태연히 선생 노릇을 해왔을까. ‘가만히 있으라’며 떼죽음을 방치한 노릇과 초등학생의 동시집을 ‘잔혹’하다며 전량 폐기시킨 노릇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또 다른 노릇으로 속전속결 장면 교체되는 이 사회에서 선생 노릇은 대체 뭔가.

이홍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후쿠시마의 미래>에 나오는 일본 어머니의 미어지는 말대로 정부도 어른도 믿을 수 없으니 “도망가라”고 해야 할까. 아님 선생 노릇의 몹쓸 정체를 고백하고 요령껏 사용하라며 미리 일러둬야 할까. 선생이 실은 생선이라고, 싱싱할 때 바로 회쳐 먹거나 팔팔 끓여서 식혀 먹거나 바짝 건조시켜서 필요할 때 꺼내 먹으라고. 안 그러면 금세 부패하는 게 선생이라고. 선생 사용법과 생선 사용법이 같으니 던져 주는 거 받아먹는 개가 되어 기다리지 말고 노려보다 날쌔게 잡아채서 사라지는 고양이가 되라고. 이렇게 아이들과 후배들에게 말해야 할까.

선생 노릇 하느라 감정이 복잡한 어른에겐 다음 책을 권한다. 최기숙의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2001)과 자크 파라디의 <부모님을 용서하는 방법에 대한 발칙한 보고서>(2004)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꼰대질’과 ‘멘토질’은 모두 부패해가는 생선의 폐기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려는 나이 든 사람의 역한 고집이거나 방부제를 친 고독이겠다 싶은 연민이 든다. 그러나 이런 잡념도 접고 그냥 선생 노릇을 딱 멈춘 자리에서 자녀나 학생이나 직원이나 후배와 함께 ‘동료가 되는 길’과 ‘우정을 만드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오덕 선생이 일깨워준 ‘선생되기 12개 방법’을 되새겨볼수록 더욱 그렇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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