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난주에
새누리당 김태호 최고위원은 “창조적 파괴 수준”의 ‘국가 리빌딩’을 주문했다. 지난달엔 새정치민주연합 조국 혁신위원이 당에 필요한
것은 “자멸적 안주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라고 단언했다. 석 달 전엔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보수와 진보 진영의 창조적
파괴”를 역설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양당 체제의 “창조적 파괴”를 선언했고,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지난해 취임 후 ‘창조적
파괴’론을 들며 “도지사부터 바뀌고 기득권도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근래 들어 정치지도자들의 ‘창조적 파괴’ 애용이 부쩍
늘어났다.
이 유행어의 기원은 알려진 대로 경제학이다. 단적으로 5년간 40조원을 투자하는 정부의 ‘창조경제 생태계 조성’에 따라 17개
대기업이 참여한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성공 열쇠말이 ‘창조적 파괴’다. 각종 경제연구소 보고서와 언론은 ‘창조적 파괴’를 전가의
보도로 반복 변주한다. 나아가 정종욱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은 말했다. 율곡의 창업-수성-경장(更張) 3단계
국가발전론을 인용하며 광복 70년의 대한민국은 “과감한 새로운 도전”을 요청받는 경장 단계로, 이는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창조적 파괴”라고.
‘창조적 파괴’라는 이 조어를 103년 전에 처음 사용한 이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다. 그 맥락을 집대성한 책은 73년 전에
나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다. 한국어판은 1985년에 첫선을 보였으나 2011년 한길사에서 새로 냈고
김영사는 어린이용 인문교양 만화로 각색했다. 요약하면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성공한 결과 그 풍요 위에서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전환된다고 봤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복지국가의 수요, 기업가의 혁신활동 사회화, 교육과 엘리트 지식인들의 정치에 의해 작동된다.
슘페터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전후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사회주의로 보지 않았다. “기생충”인 기업가의 탐욕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실패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정의한 마르크스의 생각과 다른 발상이다. 자본주의 성공이 사회주의로 연결된다는
슘페터 이론의 출발점에는 기업가의 혁신활동 요체인 ‘창조적 파괴’가 있다.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것을 창조하는 혁신이 거듭되어
자본주의가 성공하면 그 정점에서 기업가의 혁신활동은 독과점 관료체제로 굳어지는데 이를 규제하면서 사회주의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슘페터(왼쪽)와 레드버스 오피 _ 경향DB
하나 후학들은 그의 ‘창조적 파괴’를 탈맥락화했다. 반대로 복지망국론과 사회무용론을 앞세우며 무한 혁신의 ‘창조적 파괴’라는 기도문만 남겨서 자본주의 ‘천국’을 찬송했다. 이를테면 경제학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론이 대표적이다. 20년 전에 선뵌 ‘파괴적 혁신’론은 경제, 교육, 의료를 넘어 국가의 혁신이론으로 확장된다. 그의 저작은 2005년부터 10여권 번역됐는데 그중엔 일본인 저술가가 요약한 <파괴적 혁신>(2010)이란 자기계발 실용서도 있다.
그에 따르면 기존 것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지속적 혁신’은 이런 규범을 무시하고 새판을 도입하는 ‘파괴적 혁신’에 의해 와해되는
딜레마에 놓인다. 아예 ‘와해적 혁신’으로 번역한 경우가 많은 것도 ‘파괴’로는 부족해서일지 모르겠다. ‘와해적 혁신’은 ‘와해적
기업’을 이끄는 ‘와해적 인재’상으로 실현된다. 현존하는 조직과 관계들과 종사자 전체가 ‘와해성 혁신’으로 일거에 ‘와해’되는
이유는 먼저 ‘파괴’하지 않아서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불멸하고 국가경제는 끝없이 성장을 도모하는데 대체 무엇이 나아지는
것일까.
정교한 잔패스로 유명한 스페인 축구의 몰락과 두세 번 긴 패스로 골을 넣는 미국 축구의 급부상을 ‘와해적 혁신’으로 풀이하거나,
한국과 중국 프로기사의 바둑 대국을 ‘창조적 파괴’의 한 수로 해설하는 것은 그렇다 치자. 만약 누군가의 삶을 ‘와해’시키는 것이
나의 가치로 평가되고 누군가의 꿈을 ‘파괴’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슘페터는 ‘파괴’를 말했지만 혁신의 끝을
상정했고 그 다음의 ‘창조’를 상상했다. 지구 용량이 무한하지 않고 인류 문명이 영원하지 못한 우리 삶의 조건을 직시하면서도
혁신적 개인들의 미래 사회를 낙관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나의 창조’가 ‘너의 파괴’가 되는데도 알 방도는 물론 책임질 수도 없는 세계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적 개인의 ‘창조적 파괴’ 이전에 연대하는 개인들의 ‘창조적 협동’이 사회를 촘촘하고 튼튼하게 감싸고 있어야 한다는
것.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의 당면 과제는 성장이 멈춰도 혁신이 끝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경제위기와 국민투표는 무엇이 ‘와해’되고 있으며 정작 무엇을 ‘파괴’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지난 칼럼===== > 김종휘의 횡단보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916명의 난민 예술가 (0) | 2015.09.09 |
---|---|
자신을 행복하게 남에게도 행복을 (0) | 2015.08.19 |
고독사, 무연고, 예술가 (0) | 2015.07.07 |
위선과 위악을 걷어 낸 자리 (0) | 2015.06.10 |
선생이냐 생선이냐 (0) | 2015.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