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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소란한 시위 현장의 붉은 머리띠가 위악이면 엄숙한 법정의 검은 법복은 위선이다. 약한 동물은 비명을 지르고 맹수는 소리 없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이다. 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요점은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신영복 선생은 신간 <담론>(돌베개)의 15강 ‘위악과 위선’ 편에서 말했다.
6월2일 종영된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 위선과 위악의 인간상과 사회상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함께 보여준 명작이었다.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PD가 선뵌 이 드라마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비를 수미일관 세밀화(공간, 조명, 의상, 동작, 눈빛, 말투, 언어 등)로 그려냈다. 아울러 풍자의 호흡과 블랙코미디 문법으로 강자와 약자가 상호 작용하며 따로 또 같이 혼란에 빠지는 관계의 서사를 30부작의 기승전결로 주조했다. 한마디로 <풍문으로 들었소>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과 김홍신의 <인간시장>(1981)이라는 양극을 접하고 한참이 지난 2015년에 TV에서 만난 우리사회의 문제적 문학이다.
<풍문으로 들었소>를 두고 “모두 불편한 드라마가 안기는 재미” 같은 기사가 나오는 것도 신영복 선생 말대로 “강자가 모두 위선적이지도 않고 약자가 모두 위악적이지도 않”은 현실을 담아내서다. 드라마 제작인은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각자 자신들이 어떤 삶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요지를 밝혔다.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깊게 되새기려면 ‘첫 모습’을 상기해야 좋겠다. ‘제왕 집안’의 청소년 아들과 서민 집안의 청소년 딸이 눈이 맞아 임신을 하고 ‘제왕 집안’에 들어와 결혼을 선언하고 애를 낳는 것이 첫 모습이다.
이 최초의 사건은 ‘제왕 집안’의 부모와 권력의 무리, 이들의 손발과 머리까지 도맡은 비서들과 집사들, ‘죄인’이 된 서민 집안의 가족, 부부이자 부모가 된 남녀 청소년 등 드라마의 모든 주체가 갑과 을 사이의 함수관계를 오락가락하는 혼돈의 사태로 발전한다. 사건이 사태로 심화되는 기승전의 결이 각자 “어떤 삶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자리라는 점이 이 드라마가 빼어난 이유다. ‘을들의 반란 성공’도 아니고 ‘위선이 귀여운 갑질’도 아니라 각자가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시작하는 자신의 자리 찾기, 그 마지막 결정에 새로운 출발점이 찍혀있다.
같은 책 13강 ‘사일이와 공일이’ 편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자의 여유”일지 모르나 “자기 개조의 길”을 떠나지 않는 한 “패권 논리”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니고 “옆 사람의 변화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된다는 사실에 있다. 드라마에서 ‘제왕 집안’의 권력자 아버지가 홀로 남는 마지막 장면과 청소년 부부와 아기를 둘러싸고 을들끼리 공동체 관계를 형성하며 끝나는 장면의 대비는 승패가 아니라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결정의 유무로 나타났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정연,김학선,김정연 (출처 : 경향DB)
이 결정에 이르기까지 30부 드라마가 내내 유지한 또 다른 강점은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기승전결을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있지만 이 드라마에선 모든 출연자가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본 사람은 안다. 같은 책 14강 ‘비극미’ 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는 외모의 차이가 아닙니다. (중략)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엑스트라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죽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면 빛납니다.” 모든 출연자가 주인공이 되었기에 그들은 친구와 애인과 가족이 될 수 있었다.
16강 ‘관계와 인식’ 편에서 말하길 “최고의 관계”는 “서로를 따듯하게 해주는 관계,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는 관계”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렸던 “그 사람과 함께 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장 먼저 결정한 주체는 드라마의 청소년 부부이자 부모였다. 이들의 결정을 깨닫고 키워주고자 어른들이 새로운 관계를 선택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옆 사람의 변화”를 함께 만드는 관계를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자 그 자리에 돈과 권력과 갑을 대신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 꽃은 한 송이가 아니다. 아기의 탄생이라는 첫 모습이고 청소년이라는 웃자란 모습이며 이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다시 결정하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진 꽃밭이다. <담론>을 읽었다면 <풍문으로 들었소>를 보고 드라마를 봤다면 <담론>을 정독해보면 좋겠다.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고 싶다면, 내가 선택할 마지막 자리가 새로운 관계의 출발점이길 바란다면.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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