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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건강하게 자라나야 할 수많은 아이들이 매일같이 오가며 아픔과 슬픈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4월14일 새누리당 박준 경남도의원이 한 말이다. 창원 반송초등학교 담에 설치하려던 ‘세월호 기억의 벽’을 옮기게 만든
명분이다. “그 전쟁과 아무 관계가 없는 우리 자식과 손자, 후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서는 안된다.”
8월14일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한 말이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남긴 죄과와 일본 전후세대는 무관하다는 명목이다.
이들이 말하는 ‘기억’과 ‘사죄’는 무엇인가.
앞말에서 ‘아픔과 슬픈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과 상반된다. 박준 도의원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과
기억을 되새기”는 취지는 좋다고 했으나 그것을 “매일같이 오가며” 아이들이 되새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라고 강조했다.
‘아픔과 슬픈 기억’은 ‘적당히’ 되새기고 그쳐야지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되새기게 해서야 되겠느냐고 공박한 셈이다. 이로써
반송초등학교의 “매일”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고 사과도 받지 못해 1년 넘게 농성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매일”과 구별되었다. 이 구별은 나와 당신에게도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뒷말에선 이 구별이 아예 ‘관계 없음’으로 바뀌고 ‘책임 없음’이 된다. 아베 총리는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해왔다”고 과거형을 써서 현재의 일본과 구별했다. 구실은 “전쟁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전후세대가 인구의 8할을
차지한다는 것이며, 1954년생 아베 자신도 포함돼 있다. 침략전쟁의 A급 전범인 외할아버지와 전후 일본 총리가 된 외할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아버지에 대해 아베 총리는 무관하고 무책임한가. 아니다. 8월15일 아베 총리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의 “영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변함없다고 발표했다.
아베 총리처럼 가해자인 조상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 침략전쟁을 기억하면서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미래세대 무죄’를 강변하는 정신상태는 영화 <베테랑>의 두 장면과 겹친다.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막무가내의 가해자인 재벌 3세 조태호(유아인)에게 묻는다. “ ‘미안합니다’ 사과 한마디면 끝날 것을 왜 크게 일을 벌이는 거야?”
다른 장면에서 가해자 조태호는 체불임금 420만원을 지급하라며 1인 시위를 하는 피해자(정웅인)와 그의 어린 아들을 사무실로
데려와 겁박을 한다. “어이가 없네! 420억도 아니고 420만원?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바빠 죽겠는데 이러고 있는 거야?”
배우 황정민, 유아인이 출연한 영화 '베테랑' 중 한 장면_경향DB
기억이 정직하지 못한 사죄는 피해자에겐 폭력과 공포, 가해자에겐 억압과 기만이다. 전후 70년간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기억은
정직하지 못했다. 하여 가해자 일본(인)은 죄책감을 무의식 속에 누르고 세계 평화를 선도하는 선진국 코스프레에 빠져 산다.
반면 한국(인)은 피해의식을 도덕적 우월감으로밖에 달리 표출할 수 없어서 분노했다가 제풀에 지치는 쳇바퀴를 돌린다. 이 악순환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신문에 말한 대로 “(피해자가) ‘이제 됐어요’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 사죄”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사죄는 피해자가 됐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 위해 사죄는 대를 넘어 계속해야 한다. 1970년 12월7일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기념비’ 앞에 섰다.
그로부터 28년 전 독일은 바르샤바의 유대인 45만명 중 30만명을 학살했다. 추도사를 하지 못한 총리는 춥고 비 내리는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독일의 숨길 수 없는 악행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에서 나치에 목숨을 잃은 숱한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다.”
브란트 총리의 회고처럼 가해자와 피해자, 후손들 사이에서 치유는 그렇게 온다. 죽임과 죽임당함의 얽힌 인연이 풀어지는 첫 순간은 정직한 기억 위에서 제자리를 찾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대면으로 열린다.
후손을 조상과 구별하고 나의 기억을 그의 기억과 구별하는 한 진실과 치유는 없다. 66년 전 6월26일 암살당한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 꿈꾼 “아름다운 나라”의 “높은 문화의 힘”은 세계 1위의 자본과 무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정직한 기억과 치유에서 자라난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의 “매일”은 세월호 유가족의 “매일”과 구별되지 않아야 옳다.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은 ‘아픔과 슬픈 기억을 되새기는 것’을 통해 일어나는 “높은 문화의 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옳다.
일
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싸우며 집필한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이라 했던
“높은 문화의 힘”은 정직한 기억 속에서만 싹튼다. 일본과 후손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계속 사죄해야 옳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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