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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핍박받는 이방인을 돕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네인들도 오이디푸스가 변방의 마을 콜로노스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당장 이 나라를 떠나시오. 그대가 우리 도시에 큰 짐을 지우기 전에 말이오.” 오이디푸스에 대한 끔찍한 소문을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테네인들은 재앙에 대해 오이디푸스한테 직접 들은 후에는 그를 받아들였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다가가기를 주저하면서도 그를 보호할 용기를 낸 지도자 테세우스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 또한 한때 ‘이방인’이었으며 내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한낱 ‘인간’이라고 했다. 이방인을 환대한 주인은 어제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며, 내일 다시 이방인일 수 있음을 인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개인사처럼 고백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다. 모든 주인은 한때 손님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잠정적으로 이방인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방인을 배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한 도시가 이런 풍습으로 높은 평판을 얻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드문 일인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로 칭송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을 두드리는 이방인은 천사일 수 있지만 강도일 수도 있다. 상황이 확실치 않다면 문을 닫아 거는 것이 안전하다. 우리가 미지의 존재에 대해 희망보다 공포를 크게 느끼도록 진화해온 데는 그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서는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경고한다. 문을 함부로 열면 살해될 수 있다고.

그런데도 우리 안의 테세우스는 왜 주저하면서도 용기를 내는가. 우리 존재의 높은 곳에서 또 하나의 경고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문을 닫아 걸면 살인자가 될 수 있다고. 또한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결국에 자기 안의 인간을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우리 존재의 일부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한 말이다. 그는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가 인간절멸수용소인 이유를 가스실에서 찾지 않았다. 가스실로 가기 전 이미 수용자들은 인간 파괴를 겪는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 그렇게 다른 사람에 비치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유대인을 그런 상황 속으로 몬 독일인들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을 화장터 땔감 정도로 보는 한에서 그들 역시 자기 안의 인간을 살해당한 사람들이다.

인간절멸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전 레비는 수용소가 비로소 죽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독일군이 환자들을 방치하고 떠난 곳에서 한 사람이 빵 조각을 나누자는 제안을 했을 때였다. 그 전까지 수용소의 불문율은 이런 것이었다. 우선 네 빵을 먹어라.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옆 사람 빵도 먹어라. 생존이 문제 되는 곳이니 윤리를 따질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문율이 말해주는 것은 여기가 사람이 죽는 곳, 즉 인간절멸 장소라는 사실이다. 결국에 이런 수용소를 무너뜨리고 사람을 살려낸 것은 내 빵 한 조각을 떼어주는 행동이었다.

레비는 이 끔찍한 인간절멸수용소가 “이방인은 적이다”라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우리 영혼 밑바닥에 대전제로서 이 문장이 자리 잡은 뒤 어느 순간 논리적 전개를 통해 죽음의 수용소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특정한 곳에 있던 특별한 시설이지만 그것을 낳은 문장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아주 흔한 반응이다. 드문 것은 이방인에게 빵 조각을 떼어주는 일이다. 유대인 난민들이 밀려왔을 때 그리고 독일이 그들을 처리할 것을 사실상 강요했을 때, 자기 빵 조각을 떼어주며 거기에 저항했던 유럽 국가도 덴마크와 불가리아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드문 행동에 ‘인간의 가능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일 가능성’이 달려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우리의 빵을 움켜쥐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흔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생존이 있지만 사유가 없고 개인이 있지만 인간이 없다. 나를 떠나 너에게 다가갈 수 없다면, 즉 내 안에 네 자리를 허용할 수 없다면, ‘일깨움’이라는 말도 불가능하고 ‘함께’라는 말도 불가능하다.

지금 제주에는 수만명이 죽어가는 전쟁통을 가까스로 탈출한 난민들이 와 있다. 불행한 것은 자신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보다 이들이 늦게 도착했다는 것. 이들이 오이디푸스처럼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가 아테네이고 우리가 테세우스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머지않아 위장 난민 여부에 대해 심사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심사를 통해 우리도, 이 나라도 심사받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500명 앞에 선 5000만명. 우리의 사유와 인간, 공동체의 가능성이 0.001%를 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를 포기하면 안 된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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