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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대표작품 <몬스터>는 통독 이전의 동독이 배경이다. 당시 동독에는 서독으로 망명했거나, 사상범으로 처벌받은 부모의 자식들을 대거 집단수용하는 고아원이 있었다. 그 고아원에서 국제적 스파이 기계로 양성되는 10대들의 처참함이 소시오패스의 온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살인병기 소년은 매일 배급되는 우유를 친구에게 주면서 이렇게 부탁한다. “너라도 내 이름을 꼭 기억해줘!” 자신들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게 만드는 철저한 스파이 육성 프로그램은 인성과 인격의 마지막 피난처마저 상실케 한다.

통독 이전의 동독은 올림픽 때마다 메달 상위권의 위상을 유지해왔다. 그들이 국가적 스포츠 육성전략으로 밀어붙였던 전체주의적 정책은 실제 비인간적인 국가권력의 통제로 외부에 알려졌다. 수영선수끼리 결혼시키고, 수중분만을 거쳐 태어난 아이를 다시 수영기계로 양성시키는 프로그램을 통해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만든다는 루머는 비단 과장된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포츠는 음악과 미술 등 예체능적 체험과 함께 인성을 함양하고,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하며, 삶의 깊이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공론화 지대를 제공한다. 그렇기에 학교체육과 시민체육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풀뿌리 네트워크의 시작이며 청소년들의 비상구 역할도 맡아야 할 경험의 산실이다. 그러나 국내 스포츠가 보여주는 스타 마케팅과 실적 위주의 영재스포츠는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운용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 영화 중에는 이러한 스포츠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도리어 감동을 상품화했던 사례들이 많다.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킹콩을 들다> <페이스메이커> <튼튼이의 모험> <달려라 하니> 등 종목에 관계없이 눈물과 투혼이 주제가 된다. 스포츠는 정직한 땀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건강한 사회의식과 자아를 형성하는 즐거운 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스포츠는 안타까움과 눈물, 헌신과 고통, 낙담과 분노, 그리고 극복과 성공이라는 서사로 이해되는 인위적 카타르시스의 기계적인 악순환이 아닌가 싶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남북의 평화를 가져오고 한국 동계스포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눈부신 성과와 스타선수를 위해 수많은 사연들의 안타까움이 가려져 있었다는 것은 이제 모두에게 상식이 됐다. 모든 국내 스포츠 현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폭력과 계급이 상존하며, 한 사람의 스타선수를 만들기 위해 부모의 인생이 희생되기도 한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의 아이슬란드 축구대표팀 사례는 더 감동으로 전해진다.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 자신이 즐기는 스포츠 종목의 대표선수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최선을 다해 조국에 헌신하는 스포츠정신, 그들의 일상이 부러움을 넘어 영화처럼 느껴진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찾아오는 영화 <러브액츄얼리>에서 뻔뻔한 미국 대통령을 앞에 두고 영국 총리인 휴 그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엔 베컴의 왼발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나라이며, 처칠, 비틀스, 숀 코널리, 해리포터, 그리고 베컴의 오른발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박지성의 왼발이 있고, 김연아의 트리플악셀과 윤성빈의 스켈레톤도 있다. 그리고 손흥민의 오른발도 있다. 이처럼 스타선수들이 국민 모두에게 주는 자부심의 가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결국 스타선수를 위한 국가적 투자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한 투자의 과정에 학교체육과 시민체육의 건강하고 다양한 리그와 시스템이 적절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조기축구와 실업축구 전국리그에서 우승한 팀의 선수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구조가 열려 있어야 한다. 학교체육을 통해 건전한 사회인이 육성되고, 그들의 체험이 다시 시민체육을 활성화시켜 국가 전체가 운동을 취미와 생활로 함께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기대해본다.

판사가 축구감독이 되고, 자동차 정비사가 수비수가 되며, 게임 개발자가 공격수가 되고, 디자이너가 미드필더가 되는 그런 영화 같은 스포츠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오늘 이 시간에도 각자의 종목에서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박수와 성원을 보낸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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