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것을 말할 때 통증을 느낀다. 기억이란 게 정신에만 저장된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이 과거를 불러오는 것처럼 몸도 과거를 불러온다. 그리고 정신이 그때를 증언할 때 몸도 그때처럼 아파온다.

유력한 대권 후보인 안희정의 성폭행을 고발한 여성의 얼굴이 그랬다.

그는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겠다며 대단한 용기를 낸 사람이다. 하지만 TV에 비친 그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고 곧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한마디씩 이어가는 증언이 마른 수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왜 곧바로 고발하지 않았는가. 왜 오랜 시간 그대로 있었는가. 그런 악의적 질문들이 성립할 수 없음을 몸이 보여주었다. 입이 말하는 것과 별개로 몸도 그때의 일을 말했다. 그가 어떤 상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이다. 몸에 서리가 내린 듯 그는 얼어붙었음에 틀림없다. 증언할 때처럼 창백하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핏기 없이 있었을 것이다. 왜 그날을 반복해서 당했느냐고? 정신이 그날을 떠올리기만 하면 몸도 그날을 떠올리며 얼어붙는데 도대체 어떤 몸으로 저항하고 고발하고 투쟁한단 말인가.

니체는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피로 쓰고 피로 말한 것을 책장을 넘기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책장이나 들춰보고 화면이나 스크롤하는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 하는 말이다. 진리에 베인 적도 없으면서 진리란 날카로운 것이라고 폼을 잡으며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문구용 칼에 베여본 아이도 그것을 기억할 때는 얼굴을 찡그리는데,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무런 통증도 없이 말해왔다.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 본격화된 날에도 그랬다. 서지현 검사가 힘겹게 검찰에서 당한 성추행을 고발할 때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되뇌었다. 그래, 검찰, 기자, 교수, 정치인들 털어대면 숱하게 나올 거야. 증언을 지켜보던 나도 아내도 가해자들을 향해 ‘나쁜 놈’이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를 떠는 아내와 달리 나는 법전을 펴놓은 판사처럼 차분했다.

성폭력부터 가사노동, 유리천장까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의 실태를 고발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여성이 떠맡고, 여성가구주의 빈곤율은 30%를 넘고, 신입사원 중 여성은 20%에 지나지 않고, 임금은 남성의 60%밖에 받지 못하며, 여성임원은 2% 남짓이다. 인터넷에는 여성비하가 넘쳐나고, 여성은 남성의 사랑하는 아내이거나 연인일 때조차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내가 아는 현실은 이처럼 통계의 현실이고 정보의 현실이며 논리의 현실이다. 이런 부당한 현실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왜 부들부들하지 않았는가. 내게 이 부당성은 통계적이고 지적이고 논리적인 부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균적 남성이나 예외적인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이었다. 평균적 남성은 나를 포함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추상적 인간이고 예외적 남성은 피는 흐르지만 나와 관계가 없는 외계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나는 통증 없이 현실을 비난할 수 있었고 이런 현실에서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은 끔찍한 성폭력 범죄자가 보통명사로서의 남자가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이윤택이고, 오태석이고, 고은이고, 박재동이고, 김기덕이고, 안희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저기서 가해자가 호명될 때마다 내가 그 표정을 알고 목소리를 알고, 어떤 때는 악수까지 나누었던 남자들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제는 내 주변의 무명인사들까지 호명되고 있다. 이들은 전자발찌가 아니라 명예훈장을 찼던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주변의 칭찬이라도 목에 둘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세상의 훈장과 발찌, 낮과 밤을 바꾸는 폭력을 자행했다.

내 고통은 타인의 것이 될 수 없다고들 한다. 고통이란 너무나 고유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 고통을 가져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의 고통을 가지려면 그의 몸을 가져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을 일깨울 수는 있다. 한 사람이 몸서리치며 자신의 과거를 불러낼 때, 비슷한 흉터를 가진 옆 사람도 몸이 떨리는 걸 느낀다. 그의 몸이 과거로 돌아갈 때, 내 몸도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내 몸은 그의 몸에서 일어난 일을 짐작할 수 있고 예감할 수 있다. 여성들의 미투!

그런데 미투의 파장이 내게도 작은 과거 하나를 불러일으킨다. 25년 전, 내가 다니던 학과의 어느 실험실에서 교수가 조교를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지금, 교수에게 멱살 잡혔을 때의 감각이 살아난다. 과대표로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글을 하나 붙였을 뿐이다. 내 멱살을 잡으며 이런 놈은 어느 실험실에서도 받으면 안된다고 소리치던 교수가 있었고, 여관에 끌고 간 것도 아닌데 손 좀 만진 것이 뭐가 문제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교수도 있었다. 가해자 교수는 뒤늦은 유죄 선고를 받고 이 땅에 살았고, 해당 조교는 상처만을 안은 채 이 나라를 떠나버렸다.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나 역시 거기 머물 수 없었고 머물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거기를 떠났다.

오늘, 문득 알게 되었다. 미투의 기억은 위드유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충격에 노출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 소중한 것이 떠오른다는 것. 이제야 현실이 조금 만져진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