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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요즘처럼 일자리를 갈구한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생존이 노동력의 판매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4차 산업혁명’이 구원자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인공지능은 천재 바둑기사의 재능조차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보면 참으로 신기한데 직장에서 보면 너무나 두렵다.

어떻든 지금은 모두가 일자리를 외치는 중이다. ‘일중독’이라는 말조차 사치로 들릴 정도로 일자리가 절박하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파산에 직면했던 한국지엠에 8000억원을 투입하면서 이를 ‘남는 장사’라고 했다. 수익을 올려서가 아니라 일자리를 지켰다는 뜻에서다. 이제는 기업가가 ‘파산’이라는 말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협상의 무기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업이 일자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기업을 보장하는 꼴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의 일자리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 절박한 상황에 무슨 한가한 물음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막대한 돈을 들여 우리가 지키고 만들고 뛰어드는 일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생각해보았으면 싶다. 당장에야 수십만명의 생존이 달린 자동차 공장의 폐쇄를 막아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에 자동차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최근에 펴낸 책 <Bullshit Jobs>에서 일자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100년의 통계를 보면 자동화의 여파로 농업과 제조업 등의 생산직은 크게 줄었다. 반면 전문직, 관리직, 판매직,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산업에서 관리 행정 부문이 크게 증대했다. 법률서비스나 홍보, 인적자원 관리, 보안 등의 일자리 말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누군가의 일상적 일을 대신해주는 직업들, 이를테면 개 목욕 시키기, 요리 배달 등의 일자리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 그레이버에 따르면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다지 의미있는 직업들이 아니다. 돈은 벌지만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꽤나 탄탄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자기 일의 무의미함을 토로하는 걸 볼 때가 있다. 실업자, 무직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분명 여기에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근대 경제학은 세상에 의미있는 일과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물은 우리에게 한없이 소중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가치하다.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그만한 연봉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기업은 잔인할 정도로 노동자의 쓸모에 민감한 곳이다. 수익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해고되었을 것이다.

기업은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돈이 되는 일을 하는 곳이다. 돈이 된다면 생태계 재앙이 닥친다 해도 강에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홍보 전문 직원을 동원해서 그 일을 녹색성장으로 포장할 것이고, 법률 전문 직원을 동원해서 소송에도 대응할 것이다. 이런 전문직이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기업에는 꼭 필요하다.

세상에 필요하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과 기업에 필요하고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다. 경제적 행동이 윤리적 결과를 산출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어떻든 경제학은 윤리학이 아니다. 문제는 의미와 가치의 간극이다. 이 간극이 너무 벌어지면 경제적 풍요를 더하는 일이 정신을 가난하게 만들고 세계를 황폐화시킨다.

우리에게 어떤 일자리가 필요한가. 지난겨울 장애인 단체들이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공공일자리 창출을 요구하며 장애인고용공단을 점거한 일이 있었다. 중증장애인들의 고용률은 채 20%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이 최저임금 보호도 받지 못한다. 최저임금법 7조에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자”에 대해서는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수가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보호작업장이라는 곳에서 일한다. 이곳에서는 80%의 노동자들이 50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는다. 일터에 고용되었다기보다 복지시설에 수용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중증장애인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데 어떻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느냐고 말할 수 있다. 옳은 이야기다. 기업의 필요에서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업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신 사회적 의미(공공의 가치)를 창출한다. 이들은 황폐화된 세계 속에서 동료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고 인권을 지키며 차별적인 사회 인식을 개선한다. 그 무엇보다 세상에 필요한 일을 그 누구보다 잘해내는 사람들이며 끔찍한 조건 속에서도 이미 이 일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다는 일자리 현황판에 어떤 일자리들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국가가 일자리 창출에 돈을 써야 한다면 돈 되는 일만큼이나 의미있는 일에 썼으면 좋겠다. 기업에 돈은 벌게 해주지만 세상에 유익함은 거의 없는 엉터리 일들보다 우리를 몇백배나 풍요롭게 해주는 일들 말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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