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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금요일 밤

opinionX 2018. 6. 4. 15:09

금요일 밤 홍대 앞은 불야성이다. 사무실이 근처인 까닭에 클럽 앞의 장사진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화려한 조명 속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경우가 많다. 무리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금요일마다 홍대 ‘불금’의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잡지를 만들고, 책을 만드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것이 20년을 훌쩍 넘었다. 1990년대 중반에 편집동인으로 문화잡지 ‘이다’를 만들고, 인문예술잡지 ‘에프’를 거쳐 과학잡지 ‘에피’를 만들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습관이다.

‘이다’를 만들면서 병맥주를 호기롭게 상자째 곁에 두고 즐기는 문인들과 술잔을 돌리며 수줍게 금요일 술자리를 시작했는데, 금요일에 일이 없어 집으로 바로 가야 하는 날이면 발길이 허전하다. 글을 쓰고 책 만드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한잔 나눌 금요일에는 학교 수업이나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만들지 않고 비워둔다. 당대의 글쟁이, 말쟁이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가끔 젊은 호기가 얽혀 만드는 사건들은 오랜 추억이다. 술자리에서 나누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책을 시작하는 일도 많았다. 공들여 책으로 만들어 수확을 축하한 것도 그 자리였다. 낯선 사람이 합류하면 어떤 스타일인지 가늠하고 그와의 거리를 정하는 기술도 터득했고 아침까지 버틸 자신이 없을 때 도망치는 방법도 익혔다.

지금도 잡지와 책을 만들면서 머릿속에 그리는 모델은 그 시절, 그 방식이다. 잡지의 방향도 정하고 기획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눈여겨본 필자들과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내용을 가다듬는다. 글이 잡지에 실리고 책이 나오면 그것을 함께 읽고 평가하는 자리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은 방법만 남았고, 그 방법에서 술기운과 열기는 점점 옅어져 간다. 일단 금요일마다 사람들 모이는 것이 쉽지 않다. 예전에 잡지를 만들던 윗세대 선생님들은 일부러 금요일에 학교 수업을 잡지 않고 출판사 골방에 모여 투고된 원고들을 읽고 저녁엔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요즘은 젊고 한창 일할 나이의 학자들이 학교에서 지는 부담이 커서 늘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잡지 편집위원들이 이런 사정이라 정해 놓은 시간을 늘 지키는 술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 자리의 주인이 모이기 어려우니 손님을 모시는 것은 더욱 어렵다.

매주 모이는 것은 언감생심. 달에 한 번 만나는데도 시간 맞추기 쉽지 않고 그 자리에 손님을 모실 기회도 많지 않다. 젊은 남자 소설가들과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야기를 잘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편집위원들이 회의하다 잡담을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바쁜 시간 쪼개 쓰는 입장에서 당연히 불편했으리라. 요즘은 덜 자주 모이고 효율적으로 회의한다. 술을 마셔도 가볍게, 커피를 앞에 두고 회의하는 경우도 많다. 군더더기를 확 줄여서 일을 하니, 결과물도 훌륭하다. 다만 잡담 속에서 얻었던 풍부한 재료들을 만나지 못하는 허전함을 느낀다거나 진한 술자리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어쩔 수 없는 ‘아저씨’라는 자조를 피할 수 없다.

지난 금요일에 계간지인 ‘에피’ 4호를 인쇄소에서 막 배달 받아 편집위원 몇 명과 조촐하게 1주년을 기념했다. 22년 전에 ‘이다’를 내고 시끌벅적하고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던 음악 공연과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자축 파티가 떠올라 여러 가지 생각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진진했다는 사실. 수학교육이 모두에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했다.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학입시개혁과 관련해서 회자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아주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학생들에게 그동안 소홀했던 민주시민 교육을 제대로 할 좋은 기회라는 이야기.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 얼마나 진행되든 모든 학생들이 고등학교 정도의 수학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을 소양 교육 정도로 대체하는 것이 학생들을 어려운 수학에서 해방시키고 좀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수학이 좀 어렵다고 모든 것을 전문가와 인공지능에 맡긴다면 궁극적으로 수포자들은 수동적이고 남들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언어도 습득하지 못하고 살도록 아이들을 내버려 둘 것인가?

금요일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을 꿈꾸면서 지금도 금요일엔 가능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는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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