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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덜해졌으나 오래전 법조 현장을 출입할 당시만 해도 검찰 수사를 비판하는 기사는 종종 있었지만 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판사들이 검사들보다 더 정의롭고 실수도 적은 훌륭한 법조인일 리는 없다. 복잡한 법조항과 판례에 능통한 전문 법률가인 판사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논리를 파고들어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갈등 해소 절차인 법원 판결마저 비판하기 시작하면 사회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대국적(!) 견지에서의 우려가 더 컸다.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나온 피고인들,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소송 당사자들 다 나름의 불만이 있을 텐데 이들이 모두 잘못된 판결이라고 들고 일어난다면 사회적 갈등은 도저히 해소될 길이 없고,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다 보니 판결에 대한 비판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판사가 어련히 알아서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했겠지, 1심 판결이 잘못됐으면 2심, 3심에서 바로 잡히겠지 하며 정당화의 근거를 찾기도 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 등 3가지로 나뉜다. 이 중 입법권이 속한 국회와 행정권을 관장하는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가 있어 왔다.

반면 사법권을 행사하는 사법부는 비판과 견제보다는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외부의 다른 권력으로부터 압력이나 간섭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명목이다. ‘법관의 독립’ ‘재판의 독립’ ‘사법부 독립’이니 하는 말은 흔히 하지만 ‘입법부 독립’ ‘행정부 독립’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이런 이유다. 그렇게 사법부는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성역이 돼 왔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독한 비판과 견제 속에서 그 속내가 상당부분 노출돼 왔다. 그에 비해 비판과 견제에서 비켜나 있던 사법부는 사회가 요구하는 투명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터진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는 그 ‘법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사법부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헌법 103조에는 판사(법관)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무엇보다 판사들의 양심을 과연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이들도, 판사들을 뒷조사한 이들도 바로 판사들이다. 그것도 이른바 법원 내 최고 엘리트라 불리는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대부분이다. 눈앞의 작은 이문을 좇아 권모술수를 부리는 그저 그런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나라를 지탱하는 사법부의 신뢰, 법관의 양심을 말하는 것이 민망할 따름이다.

사법부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잘못 다뤘기 때문이다. 상고법원 설립이라는 자기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것은 ‘사법권’을 남용한 것이고, 수뇌부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성향을 뒷조사한 것은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국가권력뿐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권력 구조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이 권력들이 잘못 작동해 벌어진 사달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터져 나오고 있다. 그 권력에 취했던 이들은 책임들을 지고 있다. 대통령의 권력을 남용한 전직 대통령 2명은 구치소에 있고, 재벌 회장인 배우자의 권력을 이용해 갑질을 한 부인과 딸들은 사회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여성을 대했던 유력 정치인은 정치인생이 끝났고, 유명 연극인은 감옥에 있고, 심지어 스스로 세상을 등진 대학교수도 있다.

사법권과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사법부의 전·현직 인사들에게도 응분의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폭로되면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사회적 혼란만 가중됐다고 한다.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대상 사건 중 하나로 거론된 KTX 해고승무원들의 반발을 놓고 판결 불복 사태가 우려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 성역 없는 엄정한 수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법원 내 판사들 사이에서도 분출하고 있다. 누구보다 판결 불복, 사법부 불신을 두려워할 일선 판사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할까. 신성한 판결이라는 신화 속에 가려 있던 권력의 남용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진정으로 신뢰받는 사법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판사들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판사들로 구성된 법원이 행사하는 사법권은 헌법이 사법부에 부여(헌법 101조)한 권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복리를 위해 써야 할 사법부의 무거운 책임이라는 점을 명심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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