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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재 | 언론인

봄볕 따가운 4월 중순 천관산 자락, 이름 높은 ‘장흥표고’ 농장이다. 버섯 종균을 참나무 토막에 삽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캡슐 모양의 종균을 참나무 구멍에 넣는 할머니들의 손길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일흔네 살 ‘능주댁’이나 팔순 ‘운봉댁’의 잽싼 손길에서 나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아침 8시 시작된 작업은 오후 6시까지 계속된다. 일손은 하루 두 차례 새참과 점심 때 잠시 멈출 뿐이다.

할머니들 솜씨는 한 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고성능 전동 로봇의 그것 그대로다.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신통할 따름이다. 그 나이에 그 기력, 그 솜씨가 놀랍다. 칠순 팔순 할머니들의 손놀림에서 강건한 힘을 느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는 게 그들이다. 농촌 마을 고샅에선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들을 흔히 만난다. 그 허리, 그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는 수십 년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인생 역정의 흔적일 따름이다. 젊은 사람 못잖은 일솜씨를 자랑하는 능주댁도 60년 농사일에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몇년 전 인공관절 수술까지 받았다. 걸음걸이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논밭을 드나드는 형편이다. 그러나 밭일을 아직 멈추지 않고 있다. 엉덩이에 붙인 채 쪼그리고 앉아 일할 수 있게 만들어진 5000원짜리 농사용 방석이 단짝이다.

 

표고버섯 수확 I 출처:경향DB

▲ “농촌의 해체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의 실종
외국 농산물이 식탁을 꾸리는 비용을 줄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농촌 아낙의 조건 없는 헌신을 어찌 대신할 수 있겠는가”

농촌 아낙에게 극한의 노동은 숙명이다. 농사일이라는 게 하늘,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이다. 변덕 날씨를 탓할 수도, 때를 놓치면 작물을 제대로 거둘 수도 없다. 젊은 축에 끼는 육십객 ‘화뱅이댁’의 꾸부정한 허리가 안쓰럽다. 가녀린 몸매의 그녀는 일 앞에서 당차고 욕심도 많다. 그는 한참 일이 밀어닥칠 땐 달빛을 등불 삼아 밤이 이슥하도록 밭일에 매달린 후유증을 피하지 못했다.

문명의 혜택도 농촌 남정네와 아낙 사이에 불공정하다. 농기구 기계화가 농촌 일손을 획기적으로 줄여주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선 수십만 평 규모의 기업형 농장도 더러 눈에 띈다. 수십 사람 몫의 일을 단숨에 해치우는 트랙터와 콤바인, 이앙기, 포클레인 등 중장비 덕분이다. 문제는 그 기계화의 혜택이 남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로부터 쟁기질과 논일은 남자 몫, 밭일은 여자 몫이었다. 땅을 갈아엎거나 벼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기계는 잇달아 상용화돼 남자들의 일손을 획기적으로 줄여놓았다. 그러나 씨 뿌리고 모종을 옮기고, 김매고, 밭작물을 수확하는 기계의 개발은 더디고 더디다. 섬세한 여인의 손길이 필요한 구석은 아직 넓은 셈이다.

밭일은 아낙들의 차지다. 불볕더위 속 콩밭 매는 일은 가히 ‘고문’이다. 7월의 무성한 콩밭은 한증막이다. 그 속에 웅크린 채 김매는 작업은 극한의 지구력과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 여름 하루 종일 허리를 구부린 채 고추 따는 일도 마찬가지다.

‘남산댁’도 대단위 농장의 단골 일꾼이다. 그의 출근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반이다. 마을을 순회하며 인부들을 실어 나르는 봉고차가 도착하는 시간이다. 영암의 농장까지는 백리 넘는 길이다. 일을 끝내고 다시 그 봉고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어둠이 짙은 밤이다. 별을 보고 일터로 나가 별을 보고 집에 돌아온다. 그의 남편이 부르는 그녀의 별칭은 ‘새벽반’이다.

기업형 농장인 만큼 사시사철 쉬지 않고 갖가지 작물을 재배한다. 남산댁은 한 달에 보름 이상 일한다. 벌써 6~7년째다. 그녀에게는 매운 중노동도 즐겁다. 노동의 대가로 집안 살림에 보태고 병환에 시달리는 친정아버지에게도 작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터다. 그동안 맏아들은 대학을 나와 취업했고, 졸업을 앞둔 둘째도 일자리가 보장돼 있다.

게다가 농촌 아낙들은 두겹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고된 농사일에 밥상 차리기, 빨래, 청소 따위 집안일도 대부분 아낙 몫이다. 그나마 세탁기가 있어 다행인가. 농민들의 입성이 예전과 달리 말끔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늘에 감사하는 농민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지난해 양파 풍작으로 값이 폭락해도 누구를 탓하지 않았다. 배추 값이 곤두박질해 그대로 갈아엎을지언정 하늘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인가. 두어 달 전까지 겨우내 추위에 떨던 배추들의 그 앙상한 몰골이 황량한 들판에 가득했다. 그래도 올해 다시 양파를 파종하고 가을엔 김장용 배추를 키울 것이다.

농민들은 젖 달라고 보채거나 우는 데도 서툴다. 그 쪽에는 역시 대기업이나 강력한 조직을 갖춘 이익집단의 힘과 술수가 높다. 그래선지 올해 총선에서도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은 농민을 유혹하는 뾰족한 방책을 내놓지 않았다. 시늉만의, 구름 잡는 방책뿐이었다. 진지한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숫자도 적고 힘도 약한 농민에 대한 무관심이 노골적이다. 밀가루에 고무신, 막걸리를 퍼붓던 박정희 시절의 추억을 자아낸다.

시장경제 체제는 농민들의 노동 강도를 한껏 높이고 있다. ‘농한기’는 진즉 사라졌다. ‘돈’의 흐름을 따라 작목이 바뀌고 다양화됐다. 비닐하우스는 겨울철에도 일손을 놀리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고단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노예로 전락한 터다. 값이 오르면 값싼 중국산을 수입해 시장을 메우면 그만이다. 그러나 값이 폭락하면 그 희생은 고스란히 농민의 몫이다.

육신의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는 농민, 특히 아낙의 힘이 오늘도 농촌을 지키고 있다. 그 조건 없는 헌신으로 자식들을 대학 보내고 나라의 인재로 키워낸다. 그 헌신은 또한 한국인 고유의 유전자, 고난을 헤쳐 가는 저력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 위대한 힘이 위기를 맞고 있다. ‘경쟁력’이라는 잣대에 밀려 농촌과 농업, 농민을 얕잡아 본 지 오래다. 농촌 해체의 그림자 속에는, 함께 사라지고 있는 값진 한국인의 유전인자가 숨어 있다. 한국 아줌마의 강인한 생명력이 그것이다.

농촌의 해체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의 실종을 의미한다. 외국 농산물이 식탁을 꾸리는 비용을 줄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농촌 아낙의 조건 없는 헌신, 하늘의 순리를 믿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대신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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