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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아니 벌써 한 달이나 지나가버렸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살아보리라, 각오를 제대로 다지기도 전에 달력은 성급하게시리 한 장을 넘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무심한 진행에 그냥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이미 바쁜 일상이 올해에도 내 삶의 정권을 잡으려는 태세이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시간을 내어 신년의 포부와 소망을 정리해본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자연과 동식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 이것이 야생학교의 목적이자 설립 취지다. 아직은 어엿한 건물을 갖춘 그런 물리적인 형태의 진짜 학교는 아니지만, 배움과 사색과 창조가 일어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학교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시험이나 입시 따위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모든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율학습이고, 숙제는 스스로 부과한 것 외에는 없는 곳. 그런 학교라면 세태가 어떻든 근본적이고 중요한 얘기들을 제대로 펼칠 수 있으리라. 어느 분야에서든 가장 낮은 우선순위가 부과되는 인간이 아닌 생명에 대해, 마치 그것이 가장 중차대한 대상인 양 다룰 수 있으리라. 적어도 야생학교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혹자는 묻는다. 현대인에게 야생이 뭐가 중요하냐고? 도시인의 삶 대체 어디에 야생과 맞닿은 접점이 있느냐고. 저 먼 산속이나 국립공원에야 있겠지만 그거야 정부나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대다수와는 무관하지 않느냐고. 실제로 많은 이들의 집과 직장 사이의 왕복구간에 살아 숨쉬는 야생의 무엇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까치나 개미와 같은 이웃사촌도 야생이긴 하지만, 느낌이 전혀 다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정말 ‘짐승다운’ 야생의 생물은 나의 주변에 없다.

그런데 잠깐. 분명히 없는데도 계속해서 보인다. 계속해서 들린다. 그림으로, 상징으로 우리 주변에 넘쳐흐른다. 팀의 마스코트로, 기업의 로고로, 브랜드의 이미지로, 야생생물은 끊임없이 회자되고 활용되고 있다. 특히 동물이 주를 이룬다. 곰표, 토끼표, 노루표, 캥거루표, 제비표 등 무척이나 다양한 업종에서 동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특정 회사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있다. 야구장에서는 사자와 호랑이와 곰과 독수리가 각축전을 벌이고, 온라인 세계에서는 새들의 입을 빌려 조잘대고 펭귄과 여우 브라우저로 인터넷을 검색한다. 실재하지 않는 대신, 야생동물은 상표로서 우리의 대다수와 매우 깊이 유관하다.


개, 돼지, 닭처럼 오래전부터 인간과 역사를 함께해온 가축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인간의 돌봄에 몸을 맡기며 야생성을 잃어버린 이 생물들은 인간의 일에 좀 쓰이더라도 크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본 피해자들이다. 기업의 경제활동은 기본적으로 자연자원의 활용을 의미하고, 그 귀결은 아주 단순화하면 야생동물의 서식지 교란 또는 파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야생동물은 자신들의 안녕에 반하거나 최소한 무관한 기업의 상징으로 아주 흔히 사용되고 있다. 아무도 나서는 동물이 없어서 그렇지, 초상권 또는 저작권 침해, 명예훼손 등의 명목으로 충분히 고소할 만한 일이다. 대체 우리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냐면서 말이다.

해준 게 있는 기업도 있다. 야생동물의 이름 또는 형상을 기업의 간판으로 활용하면서 그 ‘사용 대가’로 그 동물의 보전활동에 기부하고 지원하는 사례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럭셔리 차 브랜드 재규어를 들 수 있다. 1921년 세워진 이 회사는 원래 이름이 제비였다가 1947년 재규어로 공식 명명되었다. 재규어의 창립자는 이 동물의 힘과 기민함,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해 이 이름을 채택하게 되었다는데, 1980년대부터 재규어와 재규어 서식지의 보전에 힘써왔다. 중앙아메리카의 벨리즈,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의 열대우림에서 활동하는 환경단체를 지원하며 재규어를 위한 각종 보전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벨리즈에서는 세계 유일의 재규어 보호지를 30배 확대해 무려 400㎢가 넘는 면적의 정글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인 퓨마도 좋은 예이다. 퓨마는 지속가능한 경영의 선두기업으로서 탄소 절감 등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아프리카 유엔환경기구와 함께 아프리카 잠비아의 사자와 라이베리아의 코끼리, 나이지리아의 고릴라 보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확히 퓨마를 보호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야생동물을 두루두루 보호하는 일에 나서는 다소 특이한 케이스다.

반면 럭셔리 보석 브랜드인 카르티에는 주는 것 없이 표범을 광고에 활용해서 반대 서명운동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야생동물을 ‘무상으로’ 활용하는 한국의 기업도 이 야생 로열티를 내야 하는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 잊혀진 야생 동식물의 권리를 찾는 2015년, 야생학교는 힘차게 출발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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