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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저기도 망했네! 여긴 또 언제 바뀌었나? 길거리를 걷다 다반사로 터져 나오는 말이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추억의 장소가 되어주는 공간이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찌나 쉽게 망하고 생겨나고 또 망하는지, 요즘에는 어느 가게에 정 붙이기도 전에 간판이 내려져 있기 십상이다. 반면에 눈에 띄게 점점 많아지고 있는 곳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페이다. 우리나라에 커피를 좋아하는 인구가 저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우후죽순 생겨나는 카페는, 주력 상품의 사회적 선호도와 무관한 또 한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카페가 누군가와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곳이라면, 카페의 증가로 사람들 간의 대화도 증가했을까? 저 수많은 마주 보는 의자들은 그곳에 앉은 이들로 하여금 더 원활한 의사소통과 더욱 깊은 교감을 가능케 하였을까? 말하자면 대화와 소통의 하드웨어는 증강된 셈인데, 과연 소프트웨어는 따라오고 있는지, 그것이 문제로다.

소통이라는 화두를 머릿속에 굴리다, 누군가 켜놓은 텔레비전에 화들짝 놀란다. 아니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동물과 아이들 사이의 ‘교감’을 표방한, 그 프로그램을 본 것이다. 바로 <슈퍼맨이 돌아왔다>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아이들이 어느 수족관에 가서 돌고래와 ‘친구’가 되는 내용인데, 돌고래들은 ‘환영인사’로 꼬마들을 ‘반기며’ 그들을 ‘마음에 들어’한다. 돌고래는 ‘함께 놀자’며 아이들과 ‘대화’하고, ‘완벽한 교감’을 나눈 나머지 뽀뽀까지 한다. 물론 이 모두 돌고래와 무관한 프로그램에서 내보낸 자막일 뿐이다. 물론 이 과정에 돌고래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이 돌고래들은 야생에서 잡혀와 좁은 사육장 안에 갇힌 신세로, 자유의지에 의해 제작진 및 출연진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나? 혹자는 말한다. 어쩌다 한두 번 있는 일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거의 정기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동물과의 소위 ‘교감’을 핵심 주제로 삼아 방송을 제작해왔다. 교감의 대상도 기린, 사슴, 말, 펭귄, 물고기, 가오리, 오랑우탄 등 다양한데, 전부 인간이 인간 마음대로 부여한 감정 상태가 그 동물 본연의 것인 양 묘사하고 있다. 신체적 접촉이 동물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고, 사육사가 붙들어둔 상태에서 만지는 것조차 포함하여 모두 이 프로그램에서는 훌륭한 ‘교감’이다. 별로 해가 될 것 같지도 않은 자막 추임새는 바로 이런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의 실제 상태와는 무관하게 마치 동물이 이 ‘교감’을 인정하는 듯한 인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물이 마치 너무 ‘짓궂거나’ 심지어는 윤리적으로 나쁜 행동을 한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오랑우탄 쇼에 간 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오랑우탄이 가져가자 제작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과자 ‘뺏기’와 ‘강탈’이라고 지적한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 인간의 도덕이 적용되기라도 하는 것인 양 말이다. 동물이 무슨 짓을 하건, 어떤 상태이든 간에, 신과 같은 제작진이 붙이는 딱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존재로 치부하고 있다.

서울대공원 돌고래쇼장에서 돌고래 재돌이와 사육사들이 동물행동풍부화 프래그램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교감은 서로 감응한다는 뜻이다. 동물들은 아이들과도, 제작진과도, 시청자와도 전혀 감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오직 한쪽에서 느끼는 즐거움만을 바탕으로 상대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치부하는 것은 폭력이며, 이를 줄기차게, 일방적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행위는 동물을 모르는 순진함과는 먼 뻔뻔하고 저속한 상업주의에 불과하다. 인간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토록 분노하면서, 어째서 그 시퍼런 유사성을, 아니 그 근본적 동질성을, 눈치채지 못하는가?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가 그것이다. 열이면 열, 가해한 쪽에서는 합의하에 이뤄진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교감’이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적어도 ‘싫어하진 않았다’는 식의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물론 피해자 쪽의 입장은 이보다 더 멀 수는 없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한 폭력에 교감과 같은 단어가 쓰이는 것 자체에 몸서리가 쳐질 것이다.

동물은 말로 자기변호조차 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게다가 ‘교감’의 의무가 부여된 거의 모든 동물은 자연 서식지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좁고, 인공적이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그중 어떤 곳, 특히 오랑우탄 쇼가 벌어지는 쥬쥬동물원은, 동물단체에 의해 고발까지 됐을 정도로, 동물의 감정이나 안녕 따위는 전혀 뒷전인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공간을 정당화시켜주는 듯한 측면도 이 프로그램의 무수한 문제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한편에서는 거짓되고 강요된 교감이 오락거리로 회자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이 마치 아무 감정도 없는 것으로 전제한 공장식 사육이 자행되고 있다.

이런 행태는 이제 모두 중단되어야 한다. 교감이라는 미명 뒤에 감춰진 강요된 스킨십이 사라질 때까지, 야생학교는 진군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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