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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실패한 친구가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단숨에 비운 술잔을 힘없이 내려놓더니 이내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쉰다. 휴우. 인생의 깊고 어두운 골짜기에 빠져버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과연 뭐가 있을까. 그저 곁에 있어주면서 슬픔과 비통함을 온전히 나누어 경험하는 수밖에. 그래도 기나긴 그간의 사연과 뒷이야기를 다 듣고, 함께 아쉬워하고 분노한 끝에, 덧붙이는 고전적인 말이 하나 있다. “세상에 여자(또는 남자)가 어디 그 사람뿐이냐!” 오늘 밤의 하소연과 넋두리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잠언은 대체적으로 수긍을 받는다. 다 아는 얘기지만, 그리고 절대로 이 실연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친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인다. 적어도 오늘 밤은 이렇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같은 의미의 영어 관용문은 다음과 같다. There are plenty more fish in the sea. 직역하면 ‘바다에는 아직도 물고기가 많다’라는 뜻이다. 광대한 바닷속 수많은 물고기만큼 이 세상엔 아직 만나지 못한 이성이 가득하니, 그대여 너무 걱정 말거라. 인류가 영원과 맞닿은 듯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없이 출렁이는 물결과 파도소리에서 위안을 찾았던 역사가 길고도 깊다. 그래, 낙심하지 말자. 저렇게 물고기가 많은데. 그리고 이는 수사적인 표현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바다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옛날에는 그랬다. 산업어업(industrial fishing)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 떼가 보고되거나 잡히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도 잡고, 잡고, 또 잡아서, 저토록 넓은 바다에 실제로 물고기가 동이 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느 정도일까?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본 기구가 모니터링하고 있는 600개의 어장 중 지속가능하게 잡을 수 있는 양보다 덜 잡는 곳은 단 3%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탈탈 털리는 중이거나 이미 털렸다는 뜻이다. 전 세계 어장의 85%가량이 과도한 남획으로 고갈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거나, 고갈 후 회복 중에 있다고 한다.

물고기의 감소 규모를 가장 실감하게 해주는 수치는 어획량의 감소이다. 19세기 말, 고기잡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어부들의 불만이 잦아지자 영국정부는 진상조사를 하기 위해 1889년부터 연도별 어획량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변화의 추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자료를 ‘어업동력’으로 환산해야 한다. 돛에 의지하던 옛날 배와 위성장치까지 동원한 오늘날의 거대 어선에 의해 잡히는 양을 수평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는 참담하다. 현재 단위 어업동력당 잡히는 물고기의 양은 120년 전의 6%라는 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비행기와 군사기술로 무장한 현대어선이, 보잉747 여객기 12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초대형 저인망을 끌며 바다 바닥을 긁고 있지만, 단위 노력당 잡히는 양은 점점 줄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이 없는 먼 바다의 얘기? 한때 가장 풍성한 어장 중 하나로 여겨졌던 북대서양 대구 어장은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1992년에 어업이 전면 금지되고 4만명 이상이 생업을 잃었다. 한국과는 무관한 다른 욕심쟁이 나라들의 얘기? 동대서양 가자미와 넙치, 지중해 및 흑해 청어, 남극해 빙어 등의 어장 고갈을 유발시킨 주요 국가로서 한국은 엄연히 등재되어 있다. 좀 있다가 없어지더라도 아직은 많겠지? 넓이가 75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북해 전체에 13살 이상이 되는 대구는 단 100마리만 남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통 연령이 높은 물고기가 활발한 번식활동을 함으로써 개체군을 늘리는 역할을 하기에 이 수치는 매우 심각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 이상 침묵하고, 외면하고, 모른 체할 수 없다. 우리에 의해, 지금, 그 수많은 물고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잦은 어획으로 명태가 자취를 감춰 썰렁해진 거진항의 모습 (출처 : 경향DB)


당장 행동해도 모자랄 이때에도 우리 사회는 굼뜨기만 하다. 국내의 대표적인 참치업체들은 2012, 2013년 그린피스의 지속가능성 조사 결과 전부 하위 등급을 받았다. 업계 1위인 동원은 과도하게 어업능력을 증가시키고, 위조된 어업권으로 조업을 하는 등 2년 연속 최하위를 장식하기도 했다. ‘지속가능한 수산업을 위한 새로운 발견’이라는 주제로 수협중앙회가 2011년에 개최한 ‘제1회 수산미래포럼’에서는 바닷물고기의 감소를 걱정하는 발표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늘어난 고래는 솎아내 주어야 한다’는 제목의 발표가 버젓이 이뤄졌다. 절망 속 희망의 한 줄기 빛도 있다. 지난 3일에 국내 최초로 지속가능한 수산물 인증(MSC)을 받은 이른바 ‘착한 참치’가 출시되었다.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바다와 ‘물생명’들의 평안을, 야생학교는 염려한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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