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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자락이 보인다. 움츠린 어깨, 빙빙 두른 목도리, 모락모락 입김. 시린 바람 속을 걷는 이들은 자신들이 향한 따뜻한 목적지를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세상만사의 다사다난함이 일단락되는 이 정기적 시점에 돌입하면 도시는 들뜨기 시작한다. 연말은 정정당당한 쉼과 축제를 의미하지 않던가. 다정한 이들과 모이기, 음식 마음껏 먹기, 흥겨움에 탐닉하기 등의 행위가 거의 의무화되는 이 시간이 있기에 일 년 동안의 고생과 인내를 뒤돌아보고 또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젠 쉬어라.

얼마나 보람차게 지난 12개월을 보냈는지는 천차만별이더라도 추위가 절정에 달하는 와중에 해가 바뀌는 이때를 맞이하는 이들은 모두 평등한 생존자들이 된다.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어디냐. 축배를 들어야 마땅한 일이로다. 그래서 실제로 축배는 사방팔방에서 열심히 들리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혀 있는 송년회와 각종 모임, 파티와 가족 행사마다 ‘우리가 올해도 이렇게 함께 살아왔음’에 대한 축하가 울려 퍼진다. 때로는 좀 과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누가 탓을 하겠는가. 기념하지 않으며 사는 삶이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렇게 한 살을 더 먹는구나. 그러니 이때만큼은 넓은 세상사이걸랑 잠시 잊고 다분히 협소한 ‘나’에 각자 집중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연말, 그것은 ‘나의 계절’이다.

그래서 연말연시에는 사회적 의무감이나 대의적 공명심을 요구하는 ‘큰일’은 별로 벌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마무리 모드로 들어가 오로지 포근함과 따뜻함을 찾고 싶을 뿐인데 이때 괜스레 거창한 소리를 늘어놨다간 역효과만 보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좋은 게 좋고, 괜한 잔소리 따위는 삼가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세상. 문명이 정한 일 년이라는 단위에 마침표를 찍는 이 시기는 그래서 보기에 따라 다른 어느 계절보다도 고달플 수가 있다. 아주 외롭고 고독할 수 있다. 내가 상대적으로 소외된 사회계층에 속해 있거나, 내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나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냈거나, 나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연말연시의 기분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두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모두 여전히 ‘나’에 국한된 관점으로부터 비롯된 행복·불행이라는 측면에서 그 본질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연말연시가 가져다주는 보다 근본적인 힘듦은, ‘나’의 축제에 ‘세상’이 깡그리 잊힘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가게마다 진열된 예쁜 선물은 주는 이의 훈훈한 마음은 잘 담을진 모르지만, 그 마음도 전달되자마자 과한 포장 재료와 낭비된 종이는 한순간에 쓰레기로 둔갑시키는 것에는 무심하다. 식당과 주점은 평소보다 늦은 시각까지 주방을 돌리며 단체손님을 맞이하는 대목을 누리지만, 그 덕에 급증하는 엄청난 양의 음식 쓰레기와 도살되는 가축은 특히 지금 시기에는 논외의 대상이다. 날카로워진 추위에 좀 더 따듯함을 좇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눈에 띄게 그 수가 늘어난 모피코트는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동물들의 비명에 무감각한 차가움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준다. 호텔과 빌딩 앞을 수놓는 줄전구는 연말다운 분위기를 한껏 조성하는진 모르지만, 전선에 칭칭 감겨 전봇대로 전락해버린 애꿎은 나무들을 향한 따뜻한 눈길은 없다. 즐거운 연말인데, 이 무슨 분위기 못 맞추는 소리.

분위기? 지금 지구 전체의 분위기는 어떤가? 지난 12월14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제20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열띤 협상과 온갖 우여곡절 끝에 ‘기후행동에 관한 결정문’을 채택하였다. 이번 총회는 처음으로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감축에 참여하기로 한 점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관한 국제공조의 쾌거로 여겨지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향후 지구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내년 파리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중요한 한 단계임은 분명하다. 총회에 참석한 당사국 대표들 또한 어렵사리 달성한 과업을 두고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연말에 축하할 일이 하나 는 셈이다. 깊어가는 밤을 밝히는 화려한 전등불과 연회장을 따뜻하게 달궈주는 난방장치, 끊임없이 재생되는 음악과 동영상.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배출된 탄소가 모락모락 대기로 떠오른다. 살기 위해, 만나서 얘기하기 위해,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하지만 나와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올해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세상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된다. 축제에 초대받지 않은 자연, 그것이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추운 바깥을, 야생학교는 잊지 않는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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