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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외국에 머물 때 무척 따뜻하게 대해주신 어느 한국 교수님께 오해를 샀던 일이 있다. 내 잘못이 아니었고 다른 누구 탓도 아닌 우연의 폭력이었지만 답답하고 속상했다. 오해임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고 싶었다.

문제의 일이 있고 얼마 안돼, 어떤 세미나에 그 선생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날의 발표주제와 관련된 논문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토론 중에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당시 알던 ‘사람 마음을 얻는 방법’은 그런 게 전부였으니까. 이후 질의응답시간에 차례가 오지 않을까봐 조바심 난 나는 사회자에게 발언권도 구하지 않고 적어온 긴 질문을 내리 읽었다. 다음 순간 세미나실에 감도는 공기에서 ‘망했군’ 직감이 왔다. 내 질문에만 골몰하느라 토론의 맥을 끊고 경직된 문장들을 낭독했던 것이다. 발표자는 싸늘한 얼굴로 “그것도 중요하지요” 한마디 답하고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지금 떠올려도 부끄러운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당시 난 아직 학생이었고, 다음부터 이러지 말자 반성하며 털어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순간 내게 절실했던 것이 발표자의 답변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무 데서나 마구 나서는 부류로 그 선생님께 각인될 것이 발표자에 대한 실수나 청중 앞에서의 부끄러움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바라는 바와 점점 어긋난 모습으로 비쳐져 고통스러웠다. 만회하고 싶었고, 상황을 내 힘으로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내면의 소용돌이는 점차 커져, 종국엔 지인들도 감지할 정도가 되었다. 복도 저편에서 그분이 걸어오시는 걸 보고 꽈당 넘어지기도 했다(웃기려고 지어낸 일화가 아니다).

그러다 몇 해 지나, 학위 마치고 연구소에 갓 합류해서였다. 국제학술대회를 한다기에 관련 문헌들을 모두 읽고, 질의응답시간에 손 들고 질문을 던졌다. 멍해진 발표자의 표정에서 이번에도 ‘망했군’ 직감이 왔다. 거기 계신 분들께 각인될 내 첫인상이 그 멍청한 질문이 되리라는 사실도. 저녁만찬 때 어떤 분이 나를 두고 “어려 보여서 학생인 줄 알았지” 하신 말씀이 내 귀에는 ‘바보 같아서 어린애인 줄 알았지’로 들렸다.

하지만 처음 뵙는 분들을 의식해서 그렇게까지 속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를 믿고 좋은 기회를 주신 한 선생님께 실망을 드렸으리라는 사실이 더 힘들었다. 자책하면서 어느새 난 만회할 방안을 쉴 새 없이 궁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이러다 예전 장면들이 동일하게 재현되리라는 것을. 관계를 회복하고픈 조급함, 내가 바라는 나를 어서 보여주려는 조바심. 잘못한 게 혹시 더 있었나 싶은 불안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래, 난 실수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 만큼의 일은 아니다. 보여주고픈 내 모습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그저 한 번의 어리석은 실수일 따름이다. 당장 만회 못한다고 끝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일기장에 적어두고 조바심과 불안감이 들 때마다 펼쳐보며 되뇌었다. 의지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차츰 그렇게 되었고, 그 선생님께는 복도 저편에서 넘어지는 모습 같은 건 안 보여드릴 수 있었다. 발표자 또한 몇 달 후 그날의 질문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보내주셨고, 내가 뭔가 준비하던 때 기꺼이 조력자가 되어주셨다.

잘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이라지만,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난 타인의 맘에 닿는 것에 존재 전부를 거는 맹목성을 떨쳐낼 수 있었다. 또 관계를 밀고 당기는 재능은 내 게 아님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픈 관계든 기쁜 관계든 거기 휘둘리지 않으며 걷는 법을 익혔고, 실수를 반복하기 전에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세심증’을 앓는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어서다. 애써 만회하려 들지 말고 매일 주어진 일들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관계들은 제자리를 찾기도 하더라고 말이다. 마음대로 안되는 그대의 마음이 그대 안의 좋은 것들을 시들게 하지 않기를, 자책과 절망으로 그대를 몰아가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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