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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며 기밀문건을 무더기로 들고나왔다. 검찰이 이를 파악하자 “증거인멸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압수수색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약속을 깨고 돌변했다. 해당 문건을 파쇄하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분해해 버렸다. 일반 기업에서 퇴직한 사람이 벌인 일이라 해도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 형사사법 시스템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장본인이 차관급 대우를 받던 고위법관 출신 변호사라고 한다. 납득하기도, 용서하기도 어렵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9월 12일 (출처:경향신문DB)

‘양승태 사법농단’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은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보관해오던 대법원 내부 문건 수백건을 폐기한 사실을 확인했다. 유 전 수석연구관은 일제 강제징용, 통합진보당 사건 등에서 ‘박근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다. 검찰은 압수수색영장 심사기간이 이례적으로 사흘이나 걸렸고, 기각한 판사가 유 전 수석연구관과 함께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했던 관계임을 주목하고 있다. 법원이 증거인멸을 사실상 방조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법원은 물론 부인하고 있지만, 그동안의 행태에 비춰볼 때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사법농단 수사가 본격화한 이후 압수수색영장은 10건이 청구되면 1건 정도 발부됐다. 2016년 전국 법원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89.2%였다. 사법농단 수사 과정의 압수수색영장 기각률 90%(지난 2일 기준)는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책임이 크다. 법원이 수사 협조는커녕 수사 방해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데도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은 개별 법관의 영장 심리에 개입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사법행정의 전권을 쥔 대법원장으로서 창의적이고 대담한 조치를 강구하라는 것이다. 13일 열리는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선 강력하고도 실천적인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국회 법사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추진키로 했다고 한다. 수수방관하던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정조사를 통해 위법행위가 드러나면 해당 법관에 대한 탄핵도 추진해야 한다. 국회는 사법농단 특별법 제정을 통한 특별재판부 설치 등에도 적극 나서기 바란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오만과 일탈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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