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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의 영향으로 광장에 모이는 촛불의 규모가 다소 위축되고, 언론의 관심도 대선주자들의 행보로 쏠리고 있다. 작년 10월 말 1차 촛불집회 이후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촛불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설연휴를 앞두고 군복무기간 단축, 육아휴직 기간의 연장, 기본소득 보장, 사교육폐지 등 공약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익히 아는 바이니 이런 것 때문에 본질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한파가 몰아치는 광장에서 행진을 계속해온 목표가 이런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국민이 원하는 건 그런 정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광장에 나선 것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서지만, 광장은 거대한 배움의 학교이자 새로운 깨달음의 사원이기도 하다.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깨닫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고 집단도 마찬가지다. 5·18민주화운동 세대, 6월항쟁 세대, 세월호 세대는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유사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획득한 동시대 인구집단을 일컫는다. 아마도 오늘의 광장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사람들은 후세에 ‘2017년 촛불세대’로 불리게 될 것이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굵은 눈발과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앉아 있다. 이석우 기자

가칭 ‘2017년 촛불세대’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를 잠정적으로 ‘1987년 체제를 넘어선 2017년 체제’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광장과 언론,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표출된 ‘2017년 체제’의 국민은 정치공약과 흑색선전에 표를 몰아주는 단세포, 경조사를 찾아다니는 후보에게 표를 바치는 속물이 아니다. 2017년 체제가 지향하는 국민은 ‘불의와 어둠을 걷어내는 심판자, 스스로 자기운명을 개척하는 역동적인 주권자, 새로운 국가와 사회질서를 설계하는 창안자, 그리하여 헬조선을 헤븐조선으로 탈바꿈시키는 변화의 주체’이다.

2017년 체제의 핵심은 직접민주주의에 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구성하여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는 기본원칙은 유지하더라도, 사드 배치나 위안부 문제 합의 같은 중대한 정책결정은 반드시 국민의 심의를 거쳐야 하며, 정부는 항상적으로 모든 정보를 공개하여 국민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며,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정책 사안은 중립적인 제3자에게 중재를 맡기고 정부는 단지 하나의 이해당사자로 참여하는 것 등이 광장이 추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주말마다 광장에 계속 모일 수는 없다. 그래서 당면한 국면들이 돌파되고 나면 광장의 시스템을 일상생활 속에 옮겨 심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미 몇몇 시민운동가들이 시도하고 있듯이 인터넷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고, 수백, 수천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집단의 의사결정을 조직하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를 다수 양성하여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퍼실리테이터는 참여, 소통, 대화, 공감, 합의의 과정을 설계하고 이끄는 전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말로는 ‘화쟁(和諍) 전문가’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런 새로운 체제에서는 정치지도자들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 앞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할 일은 첫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경청하는 일’이다. 경망스러운 식자(識者)들은 누군가 말을 꺼내면 다 듣기도 전에 ‘예,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거짓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경청을 하려면 광장에서 경호원들에게 휩싸여 연설하려 하지 말고 군중 속을 돌아다니며 창발(創發)하는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파도 타기 선수’가 되어야 한다. 파도를 잘 타려면 몸에서 힘을 빼고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겨야 한다. 몰아치는 거센 민심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광장이 추구하고 있는 2017년 체제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지자체 의원이든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섣부른 공약으로 국민을 호도할 것이 아니라, 경청이라는 서핑보드 하나에 의지하여 민심이라는 거센 파도에 몸을 맡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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